시읽는기쁨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샌. 2008. 6. 23. 13:19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의 신앙관을 갖게 된 데는 이현주 목사님의 영향도 컸다. 노자와 장자도 초기에는 목사님을 통해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인에게는 목사님의 '감성의 영성'이 소중하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다. 그것은 딱딱한 교리적 믿음이 아니라 부드럽고 열린 믿음이다.

 

목사님은 전만큼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하시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은 충주인가 그 부근에서 은둔해 계신다고 들었다. 아마 이 시처럼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사시기로 작정하셨나 보다. 전에 강의를 하실 때면 강단 한 구석에서 오랫동안 기도를 올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산다는 것이 그저 자기 혼자만의 편한 길을 따르는 유유자적만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는 들꽃은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거친 비바람도 외면하지 않는다.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며,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의 꽃을 피운다.고뇌하고 아프지만, 그러나 기쁘고 고맙다. 이름 없는 들꽃의 삶은 결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독한 자족(自足)의 삶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대한 뿌리 / 김수영  (0) 2008.07.03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0) 2008.06.27
비는 내리는데 / 조병화  (0) 2008.06.18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0) 2008.06.17
묻는다 / 휴틴  (0) 200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