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104

포스트 트루스

우리 시대를 특징하는 단어 중 하나에 '탈진실[post-truth]'이 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올해의 단어로 ' post-truth'를 선정하기도 했다. 2016년은 트럼프가 등장하고 당선된 해다. 트럼프가 선거 운동 중에 한 발언의 70%가 가짜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는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세상을 보면서 누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죽었는가?" 는 미국의 철학자인 리 매킨타이어가 쓴 책이다.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탈진실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한다. 지은이는 타깃은 주로 트럼프와 공화당이다. 그쪽이 일방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탈진실'의 점잖은 정..

읽고본느낌 2024.03.22

그리고 봄

조선희 작가의 따끈따끈한 소설이다. 소설의 무대가 2022년으로 작금의 정치 상황을 앓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당선되었고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집단우울증에 빠졌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TV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희와 영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딸 하민은 3번을 찍었고, 아들 동민은 소위 '2찍'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부부니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은 이런 부모 자식간의 갈등에 더해 청년 세대의 진로와 취향, 퇴직 후의 생활 등의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를 경쾌한 필치로 다룬다. 정희는 기자 출신의 엘리트 엄마이고, 영한은 은퇴한 전직 교수다. 하민은 커밍 아웃하고 동성 연인과 함께 독일로 떠났고, 동민은..

읽고본느낌 2024.03.16

견리망의(見利忘義)

'교수신문'에서는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올해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의로움을 잊고 이익만 챙긴다'는 뜻으로, 전국 교수 1,300여 명이 뽑았다.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로 유명한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뒤집어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를 들라면 극심한 이기주의가 아닐까 한다. 옛날이라고 인간성이 달랐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의로움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제는 다들 철면피가 되고 뻔뻔해졌다. 도시와 시골, 잘 사는 이나 못 사는 이나 차이가 없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고,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되었다. 견리망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정치판이다.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의로움 따위는 헌신짝만..

길위의단상 2023.12.17

정치인의 얼굴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이웃에 살아 가끔 길에서 만나는데, 서로 목례를 하며 짧은 인사말 정도는 나눈다. 이분이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지인의 친구여서 짧은 상견례를 가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여서 거리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는 인상이 후덕하고 푸근해서 누구에게서나 호감이 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선이 된 데는 그런 이미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무난한 의정 활동에 재선을 했으니 어느덧 8년이 흘렀다. 그런데 요사이 얼굴은 많이 지치고 찌들어 보였다. 얼마 전에는 뒷산에서 마주쳤는데 표정이 영 말이 아니었다. 미소는 짓지만 얼굴에 배인 어두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8년 전과 비교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나 싶었다. 이분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정치인이 그..

길위의단상 2023.11.09

여름 하늘

염제(炎帝)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한낮 땡볕 가운데를 걸어도 긴 시간이 아니라면 즐길 만하다. 집 에어컨도 이제 한철 소명이 끝났다. 대신 선풍기 도움은 당분간 받아야겠지. 여름 하늘이 아름답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뭉게구름이 떠 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풍경만 바라봐도 지리할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면서 연신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그때마다 하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무쌍한 청(靑)과 백(白)의 그림판이다. 가을이면 운동회가 열렸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아이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함치며 뛰놀았다. 청과 백으로 나눈 것이 하늘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하늘은 누가 누굴 이기는 마당이 아니다. 청과 백이 어울리는 조화의 세계다. 지..

사진속일상 2023.08.18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프레임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진영이 여론을 이끌어 나간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외친들 도리어 코끼리를 생각나게 해 줄 뿐이다. 반대하는 순간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되어 있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가 쓴 이후 '프레임'이란 말은 유행어처럼 번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는 미국에서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고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면서 민주당이 참패한 때였다. 진보 진영이 왜 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은 '프레임'이라는 핵심 단어로 풀고 있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과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

읽고본느낌 2023.08.12

어머, 몰랐어 / 박봉준

동네 미장원에서 할머니들이 수군거리는데 선거에 나온 아무개가 빨갱이라여 빨갱이를 뽑으면 큰일 나지 암, 나라가 망하지 머리를 말다 듣기 민망스러운 미장원 원장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는 윤사월 해처럼 길어지고 그래서 그런지 그 빨갱이가 보기 좋게 떨어졌는데 나중에 미장원 원장이 친구 사이인 그 빨갱이 부인을 만나 할머니들 얘기를 했더니 어머, 내 남편이 빨갱이가 된 걸 우리는 여태 몰랐어 선거 후에도 기력이 남았는지 한바탕 휘도록 웃었다는 빨갱이 부인 - 어머, 몰랐어 / 박봉준 미국에 살고 있는 대학 동기가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어제 양재동 모임에 나왔다. 이젠 고국에 돌아와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사회주의 국가가 될 텐데 겁이 나..

시읽는기쁨 2023.07.07

위기의 민주주의

2019년에 제작된 브라질 정치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넷플릭스에 올려져 있다. 2002년에 룰라가 군사 독재를 물아내고 브라질의 대통령이 된 때로부터, 룰라의 후계자였던 지우미가 탄핵되고 부패 스캔들로 룰라가 구속된 2018년의 상황까지를 다룬다.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과 겹쳐보이면서 먼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았다. 브라질은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가 세 번째로 당선되었지만 극우인 보우소나루와는 1.8% 차이였다. 보우소나루의 극력 지지층에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최근에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식이면 룰라가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우파 기득권층이 다시 어떤 음모를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브라질 정치 구조상 안정을 찾기는 쉽지..

읽고본느낌 2023.03.23

다읽(17) - 동물농장

학창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동물들의 삽화가 들어간 책이었다. 완전한 번역본이었다기보다 다이제스트 판이었는지 모른다.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킨 동물들의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50여 년이 넘어 다시 읽어보니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냉소적인 정치 풍자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반골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사회주의자로서 러시아 혁명에 기대를 걸었으나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저지른 만행에 환멸을 느꼈다. 마르크스가 역사의 필연으로 예견한 노동자와 인민의 낙원은 한 사람의 권력 야욕 앞에서 무참하게 스러졌다. 그는 부패하는 혁명의 과정을 똑바로 목격했다. 을 통해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읽으면서 혁명 정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이 필..

읽고본느낌 2023.02.19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진중권 씨가 쓴 진보 비판서다. 문재인 정권 때 한국일보에 연재된 칼럼을 묶었다고 한다. 진중권 씨는 한때 진보 논객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극우 논객'(?)으로 돌변해서 당황했었었고 지금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다.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들어볼 만한 목소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읽게 되었다. 책을 내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인지 논리적인 짜임새는 좀 엉성하게 느껴졌다. 코로나 상황을 다룬 내용도 상당 부분 나온다. 어쨌든 문재인 정권과 진보 진영의 비판이 중심이다. 진중권 씨가 집중적으로 까는 것은 진보가 집권하면서 등장한 팬덤 정치다. 팬덤(fandom)은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현상이다. 팬덤은 배타적인 나르시시즘을 바탕으로 하기에 정치에서는 진..

읽고본느낌 2023.01.20

성남 희망대공원

성남 단대동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인근에 있는 희망대공원을 찾았다. 희망대(希望臺)공원은 1970년대에 성남시에서 만든 최초의 공원이라고 한다. 지하철 단대오거리역에서 가깝다. 희망대공원은 성남 제1공단근린공원과 붙어 있다. 이름으로 봐서 옛날에 이곳에는 공단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살지 않았으니 옛 모습과 비교는 어렵지만 면모가 일신된 것은 확실하다. 두 공원이 맞붙은 곳에 이 원형 육교가 있다. '공단'과 '희망'을 연결해 주는 다리다. 원형 육교에서 바라본 공원 아래쪽 모습이다. 배롱나무는 하얀 겨울 외투를 입고 있다. 희망대공원은 얕은 야산에 조성되어 있다. 산을 끼고 도는 산책로다. 산 꼭대기에는 공원 표지석과 팔각정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성남에 산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진속일상 2023.01.10

빈곤 포르노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 부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김건희 여사가 독자 일정으로 병원을 방문해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을 안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이것을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비판하니까, 여당에서는 여성 혐오와 아동 비하라고 발끈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모금 유도를 위해 가난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영상을 말하는 용어다.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유발하는 이런 행위를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으로 비판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먹방을 'Korean Food Porno'로 부른다고 한다. '포르노'가 우리가 상상하는 외설..

길위의단상 2022.11.17

정치적 부족주의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만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나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은 자발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부족은 즐거움과 구원의 원천이고 어떤 것은 권력을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증오 선동이 낳은 기괴한 산물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

읽고본느낌 2022.10.23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

길위의단상 2022.10.07

200일 & 50일

200일은 TV를 멀리 하고 있는 날짜다. 올 3월 9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바라지 않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표차는 0.7%였다. 앞으로 5년 동안 TV 화면으로 그를 봐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일이 지났다. 단, 스포츠 중계는 예외다. PBA 당구대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TV를 켠다. 다음달부터 배구 시즌이 시작된다. 여자배구를 좋아하니 자주 TV 앞에 앉게 될 것이다. 그 정도는 허용하기로 한다. 왜 그 사람이 싫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적은 없었다. TV를 안 보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다. 요사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처신을 보면 내 판단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부인한테서 받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TV를 보지 않으니..

참살이의꿈 2022.09.25

좌파와 우파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

길위의단상 2022.09.05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 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

시읽는기쁨 2022.08.03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오래된 생각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고뇌 속 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말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 책은 대통령을 옆에서 모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쓴 노 대통령에 대한 회고 기록이다. 은 기득권 세력만 아니라 여권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고독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육백 년 기회주의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

읽고본느낌 2022.05.02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있다. 편의상 G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시골에서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네 명이 올라왔는데, 둘은 일찍 세상을 뜨고 G와 나만 남았다. 그러니 각별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G는 나를 대부로 삼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종교적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소원한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G는 경상도 출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이고, 나는 반대편이다.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상대를 잘 아니까 조심하기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정치가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G는 문재인 대통령을 너무 싫어한다. 몇 년 전에 G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

길위의단상 2022.03.11

누구를 탓하랴

어제 보도된 사진 한 장에 깜짝 놀랐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열차를 타고 이동하며 구두를 신은 채로 앞 좌석에 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선대위 관계자들이 앉아 있다. 다른 사람이 앉는 자리에 구두를 신은 발을 그대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내 상식으로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안 된다. 구두를 벗고 발을 올려놓아도 옆 사람이 있다면 민망할 터인데 이 무슨 꼴불견이란 말인가. 윤석열 후보는 평생 피의자를 다루는 검사로 살았고, 최고 직위인 검찰총장까지 오르며 영화와 권위를 누렸다. 그런 특권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중은 찾아볼 수 없으며, 국민을 피의자 대하듯 오만불손하다.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중도덕이 ..

길위의단상 2022.02.14

정치와 술

당구 모임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만난다. 매주 한 번이지만 나는 거리도 있고 해서 출석률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나가면 네댓 시간 당구치고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는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각 소주 1병씩 마신다. 어제는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생각지도 않게 과음을 했다.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열을 받은 게 첫째 이유였다.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나는 왼쪽이다. 당연히 정치적 견해에서는 우리 또래에서 외톨이다. 반대하는 진영의 대통령이나 후보를 욕하는 게 얼마나 맛있는 술안주인가. 노털들이 서로 박자를 맞추며 비난하는 소리에 종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고 애꿎은 소주병만 늘어갔다. 술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다행히 대통령 선거와 후보에 대한 얘기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

길위의단상 2022.01.28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가 192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독일 사회를 이끌던 지도층을 조롱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화다. 그때는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치가 집권하기 7년 전이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칼을 들고 넥타이에 나치 문양을 새긴 맨 앞의 남자는 나치당원으로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다. 얼굴의 귀는 봉해져 있는데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우는 독일을 화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신문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을 상징한다. 양손에는 펜과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에는 ..

길위의단상 2022.01.26

멸공

나는 197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구호는 '필승'이었다. 3년 동안 얼마나 '필승'을 외쳤던지 지금도 머리에 손이 올라가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멸공'은 익숙하지 않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부대에 갔을 때 '멸공'이라는 구호를 듣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철책선이 지척이라 살벌한 기운이 후방과는 달랐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박멸한다는 뜻이다. 반공(反共)과는 어감이 다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없애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멸공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풍긴다. 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도 어색했던 '멸공'인데, 최근에 생뚱맞게 되살아났다. 신세계 그룹 부회장인 정용진이 SNS에 '멸공'을 올리니, 대선 후보인 윤석열이 다음날 이마트에서 가서 ..

길위의단상 2022.01.11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이라서 더 관심이 생겼다. 영상의 마술사라는 스필버그 감독이 링컨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감독이라는 걸 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1864년과 1865년에 걸친 링컨 대통령의 마지막 두 해를 집중적으로 그린다. 당시는 남북전쟁의 막바지였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13차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영화의 대부분이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원과의 줄다리기다. 당시 미국 정치의 내막을 잘 모르면 지루할 수 있지만 감독의 역량이 이를 커버한다. 정파들 사이의 불꽃 튀는 싸움이며, 뒤에서 조종하는 링컨의 포용력과 수완이 볼 만하다. 단조롭게 보일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연출의 힘이 ..

읽고본느낌 2021.12.22

가을 여행(1) - 신안

올해가 대학 입학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열아홉 살의 풋풋했던 그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갔다. 돌아보면 아득하고 멀다. 50주년을 축하할 겸 동기들 아홉 명이 추억의 가을 여행을 떠났다. 이나마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마스크를 덮어쓰고 살아야 될 줄 그때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친구의 진도에 있는 고향집을 숙소로 삼고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4박5일 동안의 일정이다. 첫째 날 - 신안 천사대교, 퍼플교 둘째 날 - 진도 용장성, 벽파정, 운림산방, 민속공연, 세방낙조 셋째 날 - 관매도 숙박 넷째 날 - 조도 트레킹 다섯째 날 - 울돌목 해상케이블카 개인적으로 진도는 세 번째 가는 길이다. 나는 2박만 함께 하고 셋째 날에는 두륜산을 오르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동기들 중에 등산을..

사진속일상 2021.11.09

국민 약 올리기

말 많은 5차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일인당 25만 원씩 소득 기준 하위 88%에게 지급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을 가르는 기준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 액수다.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소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재난지원금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나보다 소득이 많은데도 재난지원금을 받는다. 둘 다 연금 생활자면서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처지는 비슷하다. 다른 점은 친구는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밖에 없다. 친구는 퇴직 후 노는 게 심심하다면서 용케 물류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니 건강보험이 직장가입자 자격이 되어 보험료 납부액이 지역가입자인 나보다 1/3밖에 안 된다. 월 수입은 내 두 배 가까이 되면서 건강보험료는 적게 내고 재난지원금도 탄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주..

길위의단상 2021.09.15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 제목에 나오는 '좋은 국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으로 봤을 때 지은이가 말하는 '좋은 국가'는 '선진국' '강국' '선도 국가'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나는 '좋은 국가'를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에 바탕을 둔 나라라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촌에서 찾는다면 부탄이 제일 비슷하지 않을까.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말았다. 는 스웨덴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스톡홀름 싱크 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최연혁 선생이 쓴 책이다. 지나온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던 여러 나라 -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독..

읽고본느낌 2021.07.23

빈곤을 보는 눈

며칠 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최근 3년간의 국가 행복지수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OECD 37개 국가 중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35위였다. 우리 밑으로는 그리스와 터키만 있었다.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는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빈곤율 수치도 행복지수와 마찬가지로 하위권이다. 빈곤율은 약 15% 정도 되는데 우리 아래로는 미국과 일본 정도가 있다. 특히 노인의 빈곤율은 40%가 넘어서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은 경제 규모만 그렇다 뿐이지 삶의 질은 형편 없다. 나라는 부자여도 국민은 힘들게 살아간다. 자칭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도 빈부격차나 빈곤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부동산 폭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읽고본느낌 202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