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유유히

샌. 2024. 12. 15. 11:05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12월 3일 이전에 고른 것이지만 묘하게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맞아떨어졌다. 어제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이 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광란의 칼춤'을 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만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8년 전의 촛불 시위와 달리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많이 나왔다. 정치에 무관심한 MZ세대라고 폄하했었는데 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축제 마냥 즐기는 그들이 아름답고 감사했다. 젊은이들의 숨어 있던 정치의식을 윤석열이 일깨워준 것은 역설적이다.

 

현 정치 상황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올해의 단어를 고른다면 '유유히'다. '유유히'는 한자로 '悠悠'라고 쓰면 '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게'라는 뜻이고, '幽幽'라고 쓰면 '깊고 그윽하게'라는 뜻이다. '유유히'는 둘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다. '유유히'는 나만 아니라 올해 우리 가족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유유히'는 자연을 닮은 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무리처럼 나대거나 소란하지 않다. '유유히'는 느릿느릿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연상시킨다. 하늘의 구름도 유유히 흘러간다. 산맥이 굽이치는 모습도 유유하다. 유유한 자연을 닮기 위해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어 깊은 호흡을 한다. 요가와 태극권도 유유함과 통한다. 이런 수련은 삶이 유유함으로 연결되게 도와준다.

 

'도량발호'의 반대편에 '유유히'가 있다. '유유히'는 행동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으며, 속은 깊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올 여름에 첫째가 선물해 준 이 단어를 앞으로 내 삶의 지표로도 삼기로 했다. 느긋하게, 되는 대로, 그럭저럭, 살아갈 일이다. 양약(良藥)이 되어 내 조급증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란다.

 

윤석열을 보라. 날뛰어봐야 제 무덤을 팔 뿐이다. 소나기는 한때일 뿐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오래 촉촉이 대지를 적시는 봄비가 되어야 한다. '유유히'는 좋은 출발을 했다. 그 의미가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한다면 더욱 좋겠다.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길 바란다. '유유히'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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