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120

200일 & 50일

200일은 TV를 멀리 하고 있는 날짜다. 올 3월 9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바라지 않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표차는 0.7%였다. 앞으로 5년 동안 TV 화면으로 그를 봐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일이 지났다. 단, 스포츠 중계는 예외다. PBA 당구대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TV를 켠다. 다음달부터 배구 시즌이 시작된다. 여자배구를 좋아하니 자주 TV 앞에 앉게 될 것이다. 그 정도는 허용하기로 한다. 왜 그 사람이 싫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적은 없었다. TV를 안 보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다. 요사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처신을 보면 내 판단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부인한테서 받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TV를 보지 않으니..

참살이의꿈 2022.09.25

좌파와 우파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

길위의단상 2022.09.05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 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

시읽는기쁨 2022.08.03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오래된 생각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고뇌 속 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말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 책은 대통령을 옆에서 모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쓴 노 대통령에 대한 회고 기록이다. 은 기득권 세력만 아니라 여권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고독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육백 년 기회주의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

읽고본느낌 2022.05.02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있다. 편의상 G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시골에서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네 명이 올라왔는데, 둘은 일찍 세상을 뜨고 G와 나만 남았다. 그러니 각별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G는 나를 대부로 삼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종교적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소원한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G는 경상도 출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이고, 나는 반대편이다.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상대를 잘 아니까 조심하기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정치가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G는 문재인 대통령을 너무 싫어한다. 몇 년 전에 G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

길위의단상 2022.03.11

누구를 탓하랴

어제 보도된 사진 한 장에 깜짝 놀랐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열차를 타고 이동하며 구두를 신은 채로 앞 좌석에 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선대위 관계자들이 앉아 있다. 다른 사람이 앉는 자리에 구두를 신은 발을 그대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내 상식으로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안 된다. 구두를 벗고 발을 올려놓아도 옆 사람이 있다면 민망할 터인데 이 무슨 꼴불견이란 말인가. 윤석열 후보는 평생 피의자를 다루는 검사로 살았고, 최고 직위인 검찰총장까지 오르며 영화와 권위를 누렸다. 그런 특권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중은 찾아볼 수 없으며, 국민을 피의자 대하듯 오만불손하다.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중도덕이 ..

길위의단상 2022.02.14

정치와 술

당구 모임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만난다. 매주 한 번이지만 나는 거리도 있고 해서 출석률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나가면 네댓 시간 당구치고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는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각 소주 1병씩 마신다. 어제는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생각지도 않게 과음을 했다.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열을 받은 게 첫째 이유였다.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나는 왼쪽이다. 당연히 정치적 견해에서는 우리 또래에서 외톨이다. 반대하는 진영의 대통령이나 후보를 욕하는 게 얼마나 맛있는 술안주인가. 노털들이 서로 박자를 맞추며 비난하는 소리에 종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고 애꿎은 소주병만 늘어갔다. 술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다행히 대통령 선거와 후보에 대한 얘기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

길위의단상 2022.01.28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가 192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독일 사회를 이끌던 지도층을 조롱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화다. 그때는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치가 집권하기 7년 전이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칼을 들고 넥타이에 나치 문양을 새긴 맨 앞의 남자는 나치당원으로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다. 얼굴의 귀는 봉해져 있는데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우는 독일을 화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신문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을 상징한다. 양손에는 펜과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에는 ..

길위의단상 2022.01.26

멸공

나는 197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구호는 '필승'이었다. 3년 동안 얼마나 '필승'을 외쳤던지 지금도 머리에 손이 올라가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멸공'은 익숙하지 않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부대에 갔을 때 '멸공'이라는 구호를 듣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철책선이 지척이라 살벌한 기운이 후방과는 달랐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박멸한다는 뜻이다. 반공(反共)과는 어감이 다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없애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멸공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풍긴다. 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도 어색했던 '멸공'인데, 최근에 생뚱맞게 되살아났다. 신세계 그룹 부회장인 정용진이 SNS에 '멸공'을 올리니, 대선 후보인 윤석열이 다음날 이마트에서 가서 ..

길위의단상 2022.01.11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이라서 더 관심이 생겼다. 영상의 마술사라는 스필버그 감독이 링컨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감독이라는 걸 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1864년과 1865년에 걸친 링컨 대통령의 마지막 두 해를 집중적으로 그린다. 당시는 남북전쟁의 막바지였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13차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영화의 대부분이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원과의 줄다리기다. 당시 미국 정치의 내막을 잘 모르면 지루할 수 있지만 감독의 역량이 이를 커버한다. 정파들 사이의 불꽃 튀는 싸움이며, 뒤에서 조종하는 링컨의 포용력과 수완이 볼 만하다. 단조롭게 보일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연출의 힘이 ..

읽고본느낌 2021.12.22

가을 여행(1) - 신안

올해가 대학 입학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열아홉 살의 풋풋했던 그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갔다. 돌아보면 아득하고 멀다. 50주년을 축하할 겸 동기들 아홉 명이 추억의 가을 여행을 떠났다. 이나마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마스크를 덮어쓰고 살아야 될 줄 그때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친구의 진도에 있는 고향집을 숙소로 삼고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4박5일 동안의 일정이다. 첫째 날 - 신안 천사대교, 퍼플교 둘째 날 - 진도 용장성, 벽파정, 운림산방, 민속공연, 세방낙조 셋째 날 - 관매도 숙박 넷째 날 - 조도 트레킹 다섯째 날 - 울돌목 해상케이블카 개인적으로 진도는 세 번째 가는 길이다. 나는 2박만 함께 하고 셋째 날에는 두륜산을 오르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동기들 중에 등산을..

사진속일상 2021.11.09

국민 약 올리기

말 많은 5차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일인당 25만 원씩 소득 기준 하위 88%에게 지급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을 가르는 기준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 액수다.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소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재난지원금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나보다 소득이 많은데도 재난지원금을 받는다. 둘 다 연금 생활자면서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처지는 비슷하다. 다른 점은 친구는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밖에 없다. 친구는 퇴직 후 노는 게 심심하다면서 용케 물류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니 건강보험이 직장가입자 자격이 되어 보험료 납부액이 지역가입자인 나보다 1/3밖에 안 된다. 월 수입은 내 두 배 가까이 되면서 건강보험료는 적게 내고 재난지원금도 탄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주..

길위의단상 2021.09.15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 제목에 나오는 '좋은 국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으로 봤을 때 지은이가 말하는 '좋은 국가'는 '선진국' '강국' '선도 국가'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나는 '좋은 국가'를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에 바탕을 둔 나라라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촌에서 찾는다면 부탄이 제일 비슷하지 않을까.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말았다. 는 스웨덴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스톡홀름 싱크 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최연혁 선생이 쓴 책이다. 지나온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던 여러 나라 -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독..

읽고본느낌 2021.07.23

빈곤을 보는 눈

며칠 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최근 3년간의 국가 행복지수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OECD 37개 국가 중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35위였다. 우리 밑으로는 그리스와 터키만 있었다.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는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빈곤율 수치도 행복지수와 마찬가지로 하위권이다. 빈곤율은 약 15% 정도 되는데 우리 아래로는 미국과 일본 정도가 있다. 특히 노인의 빈곤율은 40%가 넘어서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은 경제 규모만 그렇다 뿐이지 삶의 질은 형편 없다. 나라는 부자여도 국민은 힘들게 살아간다. 자칭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도 빈부격차나 빈곤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부동산 폭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읽고본느낌 2021.05.22

제발

제발 국민 좀 들먹거리지 말아 다오. 국민이 너희들의 호구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를 내세우는 건 이해한다. 그건 너희들의 기득권과 조직을 위한 상식과 정의란 걸 다 안다. 어깨들이 '차카게 살자'라고 한들 분노하지는 않는다. 비웃어주면 된다. 너희들의 상식과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뻑 하면 국민을 내세운다. 국민을 위해서 분골쇄신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다는 그 의무감 좀 벗어줄 수 없겠니? 검찰총장이 짧은 성명을 내고 사표를 냈다. 그 중에 '국민'이 두 번이나 나온다. 제발 애꿎은 국민팔이는 하지 말아다오. 여든 야든, 어떤 이익집단이든 마찬가지다.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흑심은 숨긴 채. 국민이 너희들의 들러리는 아니다. 국민은 너희들이 앞장서지 않..

길위의단상 2021.03.07

26일 동안의 광복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이 조선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9월 9일까지 26일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부제가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한겨레신문의 길윤형 기자가 썼다. 1부는 8월 15일 광복 당일의 숨 가빴던 시간을 세 세력(여운형, 총독부, 송진우)의 입장에서 복원한다. 혼란한 때에 발빠르게 나선 쪽은 여운형이었다. 총독부는 치안 유지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명망 있는 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방침에 협조하면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의 중심인물은 여운형이었다. 그가 만든 건준은 안재홍 주도로 끝까지 좌우합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익을 대표하는 송진우는 좌익에 이용당할 것을 두려워해 ..

읽고본느낌 2021.01.09

나는 5.18을 왜곡한다 / 최진석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왜곡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이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센터,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님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님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들만의 5.18을 폄훼한다. 갇힌 ..

시읽는기쁨 2020.12.25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책이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만 들어갈 수 있다는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에 들어간 일곱 번째 나라가 되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취와 정치적 민주화에서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반면에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불명예의 기록도 다수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불평등이 가장 심하고, 아이들이 가장 우울하고,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고, 제일 서로를 불신하는 나라다. 이 정도면 지옥이라 할 만하다. 어느 외국 학자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

읽고본느낌 2020.11.03

친일과 대한민국

친구가 카톡으로 긴 글을 보내 주었다.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최진석 선생이다. 전에 EBS를 통해 선생의 노자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성숙한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견뎌내야 할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다. 친일과 반일에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지만 선생의 견해 역시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가을호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이다. 친일과 대한민국 / 최진석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는 나는 작년 7월에 발표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

길위의단상 2020.09.01

시무7조 상소와 하교문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7조 상소문'이 화제다. 글쓴이는 진인(塵人) 조은산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필력을 갖춘 분이 아닌가 싶다. 이분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글재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 글을 옮겨 적다 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무척 아쉽다는 걸 느낀다. 보수의 첫째 가치는 공동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을 경시하고 사리 추구와 외세 의존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일부 극우의 사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분 글의 오독인 줄 모르지만, 내 가진 것을 앗기기 싫다는 혜택받은 자의 억지투정으로 읽힌다. 사악하다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양극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20.08.30

두 견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공평무사한 입장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누구나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과 현상을 본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객관적이면서 공평한 잣대는 없다. 컵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사각형으로 보이기도 하고 둥글게 보이기도 한다. 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컵을 둥글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사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중의 하나다. 작금의 윤미향 사태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뭔지 헷갈린다. 보도를 보면 윤미향은 시민운동을 가장한 사기꾼 같아 보이다가도, 다른 편 말을 들어보면 의혹 제기가 마녀사냥식으로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만약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검찰 수사가 들어갔으니 내가 여기서 왈가..

길위의단상 2020.06.10

짜릿한 개표 방송

어제 실시한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전국 253개 지역구에서 민주당이 163석, 통합당이 84석, 정의당이 1석, 무소속이 5석을 얻었다. 민주당의 압승, 통합당의 참패다. 어느 선거나 결과가 조마조마하지만 이번 총선은 유례없는 진영 대결이 벌어져 더 흥미로웠다. 선거에서는 국민이 심판관이다. 이번 총선은 국민이 확실하게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 통합당의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낀 국민이 많았다는 얘기다. 민심이 어떠한지 통합당은 잘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제발 우리나라 정치도 한 단계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도 사라져야 한다. 이번에 그런 의원들 대부분이 낙선한 건 다행한 일이다. 이래서는 표를 못 받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줬다고 생각한다. 21대 국회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길위의단상 2020.04.16

희망사항

보통 진보와 보수를 나눌 때 민주당은 진보, 통합당은 보수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 기준으로는 민주당이나 통합당이나 모두 보수다. 민주당은 약간 진보적 색채를 띤 보수당이고, 통합당은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당이다. 진보라고 하면 정의당이나 녹색당, 민중당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나 통합당은 기득권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민주당보다는 통합당이 훨씬 심하지만, 통합당과 다르다고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재벌이나 부동산을 대하는 엉거주춤한 자세, 특히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보면 그렇다. 진보라면 사회가 다소 혼란을 겪더라도 복지나 평등, 정의의 문제에서 원칙을 견지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말이나 구호만이 아니라 정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마땅..

길위의단상 2020.04.13

이순(耳順)

얼마 전에 초등 단톡방을 나왔다. 문재인 정부를 향한 저주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다. 경상도 농촌 출신에 나이가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들이니 정치 성향이야 뻔하다. 어디서 따오는지 황당한 글을 퍼서 나르는데 작년 여름부터 정도가 심해졌다. 태극기 부대의 집회가 기세를 올리기 시작할 때다. 단톡방에 있는 20여 명 중 나 혼자만 외톨이다. 나는 입도 뻥긋 못한다. 정기 모임에 나가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너무 불편하다. 듣고만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데 그렇다고 논쟁을 할 수도 없다.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 나가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글을 매일 쳐다보는 것도 스트레스여서 이번에 단톡방도 탈퇴했다. 7, 80년대에는 지역색이 국민을 둘로 가르더니, 2..

참살이의꿈 2020.03.05

신익희 생가

우리 고장 너른골 출신의 근현대 유명 인사로는 독립운동가며 정치가인 신익희 선생과 여배우인 최은희 씨가 있다. 너른 땅에 비해 인물은 그다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할 수 없다.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으로 시집 와서 묻힌 허난설헌 묘는 초월면 지월리에 있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2~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서하리 현지에 생가가 보전되어 있다. 현재 가옥은 1925년에 지었다. 서하리 마을 입구에는 선생 생가를 알리는 돌담 벽이 있다. 여기서 100m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생가가 나온다. '조국의 독립과 정치 민주화를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실천적 정치 지도자'라는 선생의 약력을 읽어본다. 선생의 일생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해방 후 정치 활동이라는 두 시기로..

사진속일상 2019.10.27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보면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찾아오는 횟수가 하루에 500~900번 정도다. 가끔 1천 회가 넘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2천 회를 넘은 날이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다.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는가 봤더니 박노해의 '동그란 길로 가다'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동그란 길로 가다'는 2012년 5월에 블로그에 올렸는데, 하루에만 이 시를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확인차 내 블로그에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시를 다시 읽어본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

길위의단상 2019.10.23

진보와 보수

"보수의 윤리는 합법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말이다. 요사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정치 공방이 거세다. 조국 후보자는 진보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딸에 대한 의혹에 대해 그는 말했다. "적법한 행위였고 부정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합법이나 적법은 진보에서 변명으로 쓸 말이 아니다.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한때는 '강남 좌파'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제는 '진보 귀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진보 귀족은 말로는 개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삶은 전형적인 기득권층을 닮았다. 합법이라는 그늘 뒤로 숨어서 제 이득 챙기..

길위의단상 2019.08.23

노래 /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지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 김남주 조국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인용해서 화제가 된 시다. '죽창가'라는 이름으로 노래로 불려졌는데, 원래 제목은 '노래'다. 제목에 따라 시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죽창가'라고 하면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의분이 일어난다. 조국 민정수석은 SNS로 이번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법률학자답게 냉철하게..

시읽는기쁨 2019.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