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이순(耳順)

샌. 2020. 3. 5. 13:11

얼마 전에 초등 단톡방을 나왔다. 문재인 정부를 향한 저주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다. 경상도 농촌 출신에 나이가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들이니 정치 성향이야 뻔하다. 어디서 따오는지 황당한 글을 퍼서 나르는데 작년 여름부터 정도가 심해졌다. 태극기 부대의 집회가 기세를 올리기 시작할 때다.

 

단톡방에 있는 20여 명 중 나 혼자만 외톨이다. 나는 입도 뻥긋 못한다. 정기 모임에 나가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너무 불편하다. 듣고만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데 그렇다고 논쟁을 할 수도 없다.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 나가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글을 매일 쳐다보는 것도 스트레스여서 이번에 단톡방도 탈퇴했다.

 

7, 80년대에는 지역색이 국민을 둘로 가르더니, 2천 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적대감이 정점을 찍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조선 시대 당쟁을 보는 듯하다. 그저 나와 반대되는 세력이니까 밉고 타도해야 할 대상이다. 양극단은 세계의 흐름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게 민주 사회다.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오면 우선 나부터 그렇게 안 된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도 나와 반대되는 정치 성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갑자기 멀어진다. 왠지 깊숙한 얘기를 못 나눌 것 같다. 하물며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는 사람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대학 다닐 때부터 가까이 지내왔던 친구가 있다. 젊었을 때는 모든 면에서 죽이 잘 맞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로 약간씩 삐걱거렸다. 몇 달 전에 이 친구가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집회에 참석한 사진을 보내왔다. 나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 사진이 떠올라 멈칫한다. 그렇다고 정치 토론을 할 시도는 하지 못한다. 서로 낯이 붉어질 게 두렵다.

 

공자는 나이 육십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 어떤 말을 들어도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는 뜻이리라. 이순은 곧 심순(心順)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를 돌아보면 나이가 들수록 어찌 된 노릇인지 점점 까다로워진다. 특히 정치 문제에서는 양보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의 편 가르기가 완고하다.

 

나 자신이 먼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잘 안다. 나는 가만히 둔 채 남 탓만 하다가는 인간이 되기는 글렀지 않은가. 언제쯤 되어야 무슨 말을 듣더라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게 될까. 공자는 어떤 분이길래 당당하게 이순(耳順)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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