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당신 몸을 통과할래
첫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길을 열며
조금은 글썽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대통령 부인인 김건희씨의 박사 학위와 관련한 논문이 표절 문제로 작년부터 시끄럽다. 국민대학교에서는 표절 여부 조사를 미루다가 이번 달에 들어서야 표절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교수회의까지 열고 투표를 해서 재검증의 길을 막았다. 교수들의 62%가 재검증을 반대했다고 한다. 너무 권력의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자기들의 치부가 드러날 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문제가 되고 있는 김건희씨 논문은 세 편이다. 그중 한 편이 박사 과정 중인 2007년에 쓴 '온라인 운세 콘텐츠의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다. 영문 제목에서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라고 해 놓아 비웃음을 샀다. 자동번역기로 돌려놓고는 확인하지도 않고 발표했음이 틀림없다. 국문 원제 역시 내가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비문이다. 학부생 리포트라 해도 자격 미달인 문장이다.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함량 미달일 게 뻔하다. 논문의 40% 이상이 표절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고 문제 제기가 된 이상 엄격한 검증을 하는 게 맞다. 더구나 김건희씨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 부인이다. 그런데 책임이 있는 대학측에서는 교수들마저 문제를 감추기에만 급급한다. 어떤 사람은 표절은 일반적인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이래서 무슨 학문의 발전이 있겠는가. 수준 미달의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대학 강단에 선다면 저희들끼리의 짬짜미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대학과 학문이 어떤 수준인지 그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제발 정확하고 객관적인 검증을 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논문이었다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오길 바란다.
표절도 표절 나름이다. 이 시에서 노래하는 표절은 당당하고 아름답다. 정말 '불멸'의 표절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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