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멸공

샌. 2022. 1. 11. 12:50

나는 197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구호는 '필승'이었다. 3년 동안 얼마나 '필승'을 외쳤던지 지금도 머리에 손이 올라가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멸공'은 익숙하지 않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부대에 갔을 때 '멸공'이라는 구호를 듣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철책선이 지척이라 살벌한 기운이 후방과는 달랐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박멸한다는 뜻이다. 반공(反共)과는 어감이 다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없애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멸공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풍긴다. 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도 어색했던 '멸공'인데, 최근에 생뚱맞게 되살아났다.

 

신세계 그룹 부회장인 정용진이 SNS에 '멸공'을 올리니, 대선 후보인 윤석열이 다음날 이마트에서 가서 멸치와 콩을 사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 시대에 멸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놀랍고, 그걸 대뜸 받아먹는 윤석열의 행동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지도층 인사들의 장난치고는 너무 유치하다.

 

왜 정용진이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멸공을 들고 나오는지 내 짧은 머리로 헤아려 보면 결국 돈벌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북한 리스크 때문에 돈 버는데 지장이 있다는 그의 말은 진심인 듯하다. 그들이 쌓아 놓은 강고한 아성을 위협하는 최대 요소는 공산 세력이다.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엄청난 재산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멸공을 외치는 게 아닐까. 그들에게는 돈을 더 벌고 싶은 욕망만 있지 우리 사회의 양극화 해소라든가 공생의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안타까운 것은 재벌의 멸공 구호에 호응해 주는 가난한 깃발들이 있다는 점이다.

 

정용진이나 윤석열이나 군 면제자다. 한 사람은 과다 체중이고, 다른 사람은 짝눈이었다고 한다. 통계를 보니 재벌가의 군 면제율이 33%다. 삼성가는 무려 70%가 넘는다. 일반 국민의 면제율이 6%인데 어떤 변명을 할지 궁금하다. 그러면서 멸공을 외치니 염치가 없다. 전쟁이 날 때 나라를 걱정할까, 자기 재산을 먼저 걱정할까.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비행기를 대기시켜 놓고 외국으로 토낄 계획부터 짤 능력 있는 인간은 누구일까.

 

10년 전에 정용진은 20인승 벤츠 버스를 몰고 버스전용차로로 출퇴근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12인승 이하의 승합차는 여섯 명 이상이 탑승해야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할 수 있다. 20인승 버스니 혼자 타더라도 불법은 아니다. 신나게 달리는 텅 빈 버스에서 꽉 막힌 승용차 행렬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용진은 처음에 시진핑 사진을 올리고 '멸공'이라고 썼다가 논란이 되니까 김정은으로 교체했다. 그러면서 멸공의 대상이 중국이 아니라 북한이란다. 윤석열은 멸치는 다른 의도가 아니라 육수 국물을 내기 위해 산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들의 뒷 언행이 구차하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지, 차라리 당당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나 대북 정책이 문제가 있고 누구나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멸공" 같은 대결 시대의 용어를 부활시켜서 무엇을 얻으려는가. 품위를 갖춘 보수를 보고 싶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와 술  (1) 2022.01.28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  (3) 2022.01.26
스킨을 바꾸다  (1) 2022.01.05
너에게로 가는 길  (0) 2022.01.02
그 겨울의 선물  (0) 20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