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가 192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독일 사회를 이끌던 지도층을 조롱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화다. 그때는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치가 집권하기 7년 전이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칼을 들고 넥타이에 나치 문양을 새긴 맨 앞의 남자는 나치당원으로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다. 얼굴의 귀는 봉해져 있는데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우는 독일을 화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신문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을 상징한다. 양손에는 펜과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에는 피가 묻어 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지 머릿속에 든 걸 감추기 위해 요강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머리에 똥이 가득 들어찬 사람은 정치인이다. 돼지처럼 뚱뚱한 게 탐욕 덩어리로 묘사되어 있다.
위에는 살찐 성직자가 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불콰한 상태로 축성을 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옆에서 집이 불타고 있지만 눈을 감고 외면한다.
오른쪽 위에는 피 묻은 칼과 권총을 든 군인이 있다. 일그러진 얼굴은 전장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그림을 보면 1970년에 발표된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이 연상된다. 그때 시인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종류의 오적으로 간주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로스의 그림에도 다섯 부류가 등장한다. 그로스 역시 그림을 통해 독일이 휩쓸리던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경고하고 지배 계급의 타락을 고발한 용기 있는 화가였다. 그는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탄압을 받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로스가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을 그린지 100년이 지났고, 김지하가 '오적'을 쓴지도 50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발전적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의 의식 수준은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답답해진다. 1920년대의 독일 사회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그림을 소환한 이유는 작금의 우리 사회 지도층이 벌이는 행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위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의 가면을 벗기면 그때나 지금이나 오십보 백보가 아닐까.
온갖 술수가 동원되는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진심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슬프다.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한테는 저희가 속한 정파와 집단의 이익만 있을 뿐이다. 표만 된다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현란한 제스처와 사탕발림의 말솜씨에 어지러울 때면 이 그림을 떠올린다. 정치인, 언론인, 종교 지도자 등,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모두 거대한 이익집단의 한 일원, 한통속이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