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8)

샌. 2022. 2. 1. 11:29

 

귀향(歸鄕)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고, 귀성(歸省)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다. 귀성에는 '살필 성(省)'이 들어 있듯이 물리적인 거리 이동만 아니라 부모를 뵙는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는 행동에는 귀성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이 설날인데 귀성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성인이 된 뒤로 50년이 흘렀는데 설 명절은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추석은 몇 차례 못 내려간 적이 있지만, 설날 당일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는 일은 철칙처럼 지켰다. 그런데 올해부터 달라졌다. 이젠 교통 정체를 견디며 이동하기도 힘들고, 형제가 명절에 모인다 한들 서먹하니 따스한 귀성의 의미가 별로 없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께 양해해 주십사고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명절이 즐겁고 기다려지는 건 어릴 때 일이지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린 뒤로는 의미 방어전 치르듯 한다.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져서 명절이나 생일이 다가오는 게 솔직히 귀찮은 고역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화목한 집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나와 같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나훈아의 '고향역' 가사처럼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라고 노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새해를 맞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조상님을 기억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이다. 그러나 귀성의 전통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다. 이때가 되면 뉴스는 귀성길 교통 체증을 단골로 보도하지만 연휴를 맞아 관광지로 놀러 가는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한다. 명절 전후로 부모님께 인사하거나 성묘를 하고, 연휴 때는 각자 즐기는 방향으로 시대의 조류는 변해간다. 내 자식에게도 나는 그렇게 권한다. 농촌 공동체 경험을 가진 우리 세대야 아직 귀성의 의미가 있지만 자식 세대만 해도 고향의 개념이 희박하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라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는 신 유목민이 된 현대인에게 어디서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사진은 38년 전인 1984년 설날 아침에 찍은 것이다. 우리는 결혼한지 3년이 되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둘째는 태어난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의 복장에서는 설 분위기가 물씬 난다. 결혼하고 수년 동안은 한복을 챙겨 입다가 나중에는 귀찮다고 흐지부지 되었다.

 

저 시절은 자가용이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고향에 내려가는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아침에 서울 가락동 집을 출발해 버스를 두 번 타고,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풍기역에서 내려, 다시 시골 버스를 타고 고향집에 들어가면 저녁이 되었다. 날은 춥고, 짐은 매고 들고, 아이들은 보채고, 그래도 젊을 때라 힘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나는 고향을 찾아가는 설렘이라도 있었겠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고생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설날은 겨울방학 중이라 미리 내려갈 수 있어서 귀성 인파에 시달리는 아수라장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설날에 내려가면 열흘 정도 고향집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게 연례행사였다.

 

다음 해에 내려갈 때는 눈보라가 치는 무척 추운 날씨였다. 집을 나와서 조금 걸었는데 아이들은 춥다고 울고, 아내는 도저히 갈 수 없으니 미루자고 했다. 강행하느냐 내일 가느냐로 둘은 길 위에서 한 바탕 싸웠다.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이 없는데 나라를 구하러 장도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의 억지가 지금이라고 없어졌을까.

 

그래도 저 시절이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는 살아 계셨고, 어머니는 아직 한창이셨다. 엄마 아빠를 따르는 토끼 같은 새끼가 있고, 형제들 간 우애도 원만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30대 초반으로 몸과 정신이 싱싱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하하 호호 웃음소리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얄궂은 기억 창고는 과거사는 예쁘게 채색해서 저장해 두고 있다. "저 시절로 다시 돌아갈래?"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살랑살랑 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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