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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을 발표하며 한강 작가의 소설을 '시적(詩的)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한강 작가가 시로 문단에 데뷔했으니 소설에 운문의 리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작가는 대학생 때 정현종 시인으로부터 '시 창작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30년 전이지만 정 시인은 그때 한강 학생이 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선지 한강의 이 시는 정 시인의 시풍과 닮지 않았나 싶다. '흰' 공기, '흰' 밥, '흰' 김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시읽는기쁨 2024.10.15

사기[26-1]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꾸민다고 했다. 지금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에 죽겠다. 이렇게 하여 지백에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영혼이 부끄럽지 않으리라."그러고는 마침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죄수가 되어 조양자의 궁궐로 들어가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했다. 몸에 비수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양자를 찔러 죽이려는 생각이었다.양자가 변소에 가는데 어쩐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래서 변소 벽을 바르는 죄수를 잡아다 조사해 보니 그가 바로 예양이었다. 그의 품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예양은 이렇게 말했다."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소."그러자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때 양자가 ..

삶의나침반 2024.10.13

축!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그저께 저녁(2024/10/10) 컴퓨터 화면에 속보가 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보도였다. 이게 무슨 일?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가 금방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아,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구나! 이번 수상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한때는 노벨 문학상 발표일이 되면 유력한 수상자로 기대되던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나도 시간에 맞추어 소식을 기다렸다. 여러 해 동안 공염불이 되자 열기가 시들해졌고 이젠 아예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차에 마른하늘의 벼락처럼 낭보가 터진 것이다. 한림원에서는 수상 이유로 한강 작가의 글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폭력성과..

길위의단상 2024.10.12

구리 토평 코스모스(2024)

구리 코스모스 축제가 구리한강시민공원에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축제 시작 전날 코스모스 꽃밭을 미리 찾아보았다. 축제 기간은 도떼기시장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코스모스만큼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꽃이 있으랴. 코스모스 꽃길을 걸으면 아늑한 유소년 시절의 품으로 돌아가 안기게 된다. 연말에 1단계가 개통하는 세종포천고속도로에서 한강을 가로지르는 고덕토평대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덕토평대교는 한강의 33번째 다리다. 이 다리 공사로 전에 비해 코스모스 꽃밭이 많이 줄어들었다. 올 겨울에는 이 다리를 이용하면 두루미를 보러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할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24.10.11

동구릉 산책

용두회 10월 트레킹은 동구릉이었다. 트레킹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이젠 걷기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산책 수준이다. 오늘도 왕릉을 연결하는 평탄한 길을 1시간 30분 정도 산책하듯 걸었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오늘의 왕릉 역사 답사 순서는 이랬다. ▽ 수릉(綬陵)추존 문조(文祖, 1809~1830)와 신정황후의 능이다. 문조는 순조와 순원황후의 아들로 왕세자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효명세자라 하였다. 뒤에 문조로 추존되었다.   ▽ 현릉(顯陵)문종(文宗, 1414~1452)과 현덕왕후의 능이다. 조선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이다.   ▽ 건원릉(健元陵)조선을 건..

사진속일상 2024.10.11

뒷산에 오르다

여름 동안 뒷산에 들지 못했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산모기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여름 산의 모기는 2차세계대전 때 미국 군함을 향해 돌진하던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들 같다. 전에는 손수건을 휘저으며 기어코 오르기도 했으나 요사이는 귀찮아서 아예 산가까이 가지를 않았다. 그러니 뒷산 들기가 거의 다섯 달만이었다. 가을이 되니 성가시게 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산길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눈에 띄지 않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만 숲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와서인지 숲은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경건한 예배당에 든 듯해서 살금살금 걸은 숲길이었다.  법정 스님은 어느 글에서,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머스마'인 스님들을 설레게 한다고 썼다.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가 되면 선원이고 강원이고 절 안이 텅텅 빈다는..

사진속일상 2024.10.10

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무릎 수술한 사이에버스가 많이 컸네.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겠네.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눈감아드릴 테니께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성장판 수술했다면서유. 등 뒤에 바짝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다 짝 찾는 일이쥬.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그짝이 지난치게 연상 아녀?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 팔순 / 이정록  할머니와 버스 기사 사이의 농담따먹기가 흥겹다.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서 검버섯은 여드름이 되고 무릎 수술은 ..

시읽는기쁨 2024.10.09

다윈 영의 악의 기원

3권으로 된 박지리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무대는 1지구부터 9지구까지 철저하게 신분으로 갈라진 세계다. 각 지구간에는 제한된 왕래만 가능하고 서로를 침범할 수 없다. 1지구는 온갖 혜택을 누리는 파라다이스지만, 9지구 주민은 겨우 생존해 나가는 폐허가 된 세계다. 신분이 세습되는 가상의 세계지만 이미 계급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구조라고 누구나 느낄 것이다. 1지구에는 최고의 엘리트만 갈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이 있다. 주인공인 다윈 영은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학생이고, 아버지 니스는 문교부 차관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소설에는 니스, 버즈, 제이의 세 친구가 나오고 후대로 이어진 친분은 십대인 다윈, 레오, 루미의 얽힌 관계를 틀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30년 전에 살해된 제이..

읽고본느낌 2024.10.08

불갑사 느티나무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다. 마침 꽃무릇 계절이라 느티나무 둘레에 붉은 화단이 펼쳐졌다. 이 나무의 높이는 25m, 줄기 둘레는 4.5m이고 수령은 6백 년 정도다. 불갑사 느티나무는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완연히 다르다. 사찰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치고는 살아온 역정이 많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 주변에서는 참식나무 안내문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절 뒤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식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한다. 다음에 갈 기회가 있다면 살펴봐야겠다.

천년의나무 2024.10.07

불갑사 꽃무릇(2024)

올해는 불갑사 꽃무릇의 개화가 늦었다. 예년 같으면 9월 중순에 꽃무릇 축제를 여는데 더위가 늦게까지 지속된 탓에 때가 맞지 않았다. 열흘 넘게 미뤄진 하순에서 10월 초순이 한창이 되었다. 마침 이 시기에 전주에 있던 차라 2024년의 불갑사 꽃무릇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속에서 빨강의 물결을 헤치듯 거닐었다. 선운사 꽃무릇과 쌍벽을 이룰 만한 광경이었다.

꽃들의향기 202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