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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이웃에 살던 분이 이태 전에 양평으로 집을 옮겼다. 아내는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나는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오래전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 분은 두 남매를 키웠는데 장가간 아들은 행방불명이 되어 어려서부터 손주 둘을 직접 키웠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과 넷이 힘들게 살고 있다. 본인도 암에 걸렸다가 극복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늘 밝은 표정이 인상적인 분이다. 음식을 하면 이웃과 나누고 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없이 살지만 뭐든 나누어주려고 애쓴다. 이 분은 나보다 윗 연배시다. 그럼에도 챙겨줘야 할 식구가 있어 여전히 어깨가 무겁다. 막내 손주는 아직 학교에 다닌다. 들어갈 때는 못 봤는데 현관을 나오니 발 아래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하얀 조약돌로 정성스레 쓴 글이었다. 내 얼굴에는..
경안천생태습지공원에 들어서니 고니들의 우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앞으로 세 달 정도는 이곳이 고니들의 식당이면서 휴식처가 될 터이다. 둑방에 올라서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고니들이 보였다. 대개는 머리를 깃털에 박고 쉬고 있었고, 일부는 활발히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뒷산을 배경으로 유유히 거니는 고니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이곳은 지난해에 비해 연이 많이 번식했다. 이러다가는 연밭으로 변할 것 같다. 연 뿌리가 고니의 식량이라니 고니에게는 잘 된 일이다. 백조들 사이에 기러기들도 보인다. 숫자로 봐서는 아직 일부만 도래한 듯하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얘네들의 무리도 점점 불어날 것이다. 비오리도 연신 잠수하면서 먹이를 찾는 데 분주하다. 얘들을 보고 있으면 눈과 귀가 정화되는 느..
세 계절을 지나서 다시 마주했구나.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는 많이 힘들어 보인다. 주변 풍경이 스산해서 그런 걸까. 너를 둘러싼 강물도 무척 탁하다. 네가 섭취하는 영양분이 오염되어 있으면 안 되는데. 차라리 꽁꽁 언 한겨울이 나을 것 같다. 늘 전환기가 힘든 거 아니겠니. 변화에 적응하는 데 애먹는 것은 사람이나 너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모든 생물체가 그러하겠지. 그런 고통이 진화의 원동력이지 싶다. 겨울이 왔으니 너와 대면할 기회가 자주 생기겠지. 다음에 만난 때까지 잘 있으렴.
스무 번째겨울이 와도 네 떠난 자리는아직 따스해 (141118) 전생에 엄청 빚을 져서부모가 된 거야 그 빚 다 갚느라등골이 휘는 거지 스님 말씀에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남은 빚이 아직얼마나 되길래 천륜이 아니라면파산 신청이라도 하고 싶어 (141119) 내 몸에 가시가 들어 있다 갑자기 나타나 콕콕 찌른다 언제 나올지 전혀 모른다 지금은 몇 달째 조용하다 통증은 몇 시간에서 길며 일주일도 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진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가시 역시 나의 한 부분인 걸 그늘에 핀 꽃일지 모른다 고통을 주지만 날 살리는 것 역시 가시다 가시가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141120) 히말라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을 리는 없으니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물고기/어류라는 분류가 잘못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 자연이나 세상을 고정관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책에는 이런 반전이 여러 개가 나온다. 는 미국의 과학 전문 기자인 룰루 밀러(Lulu Miller)가 썼다. 과학책이기도 하고, 평전이기도 하고, 철학서이기도 하고, 에세이이기도 한 묘한 책이다. 지은이는 힘든 성장 과정을 겪으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미국 분류학의 선구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끌린다. 조던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자기 생을 개척해 나간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이..
형제들 단톡방에 옛날 가족사진을 올렸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60여 년 전에 어머니와 다섯 형제가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추정되지만 이 사진을 찍은 당시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막내의 백일을 기념해서 사진관에서 찍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어머니 나이는 서른셋이었던 때다. 어린 형제들도 그렇지만 서른셋의 젊은 어머니를 보는 것은 참으로 생소하면서 착잡하다. 지금 내 시각으로 서른셋이라면 아이로 보이는 나이다. 어머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 사진으로 AI가 만든 동영상도 같이 올렸더니 단톡방에서 여러 반응이 올라왔다."세월이 무섭네요. 세상은 너무 변했고...""아! 옛날이여...""사진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네요.""엄마, 잘 키워주셔서 감사드려요. 자..
치맥을 마시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눈발이지만 도시의 희뿌연 하늘을 가득 채우며 찾아왔다. 종종걸음 치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들 설레보였다. 버스는 첫눈 속을 느릿느릿 나아갔다. 내 옆에 선 한 소녀는 미소를 띤 채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전송하고 있었다. 메시지가 나에게 온 듯 기분이 좋아졌다. 집 앞에 도착하니 눈은 더욱 촘촘해졌다. 생맥주집에서 앞자리에 앉았던 친구는 500cc 두 잔에 꾸벅꾸벅 졸았다. 그의 구부러진 허리와 치과 치료를 받는다고 발치한 앞니의 뻥 뚫린 쓸쓸한 자리가 슬펐다. 젊었을 때는 운동으로 다져진 강인한 육체를 모두가 부러워했다. 철봉에 매달려 360도 회전을 연속으로 하면 박수를 치며 응원했는데,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구나...
효문제가 즉위하자 회남왕은 자신이 황제와 가장 친하다는 생각에서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한나라의 법을 어기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황제는 형제라 하여 언제나 너그럽게 용서했다. 효문제 3년에 여왕이 입조하였는데 대단히 오만하였다. 여왕은 황제를 따라 원유에 들어가 사냥했는데 황제와 수레를 함께 탔으며 황제를 늘 큰형님이라 불렀다. 여왕은 재주와 힘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힘이 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다. 그는 벽양후를 찾아가 만나기를 청했다. 벽양후가 그를 만나러 나오자 소매 속에 감춰 두었던 철추를 꺼내 후려친 다음 따르던 위경에게 그 목을 베도록 했다. 여왕은 즉시 대궐로 달려가 엎드려 웃옷을 벗고 사죄하며 말했다."신의 어머니는 조나라 왕 사건에 연루시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당시 벽양후가 힘을 썼다면..
도대체 기가 막히고다른 도리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세상에 가장 작은 불꽃을 들었네들어본 이는 알 것이야작은 눈물에도 흔들리며 더 작은 바람에도 꺼지는 불을꺼지면 다시 켜들고켜든 꽃들 왼쪽과 오른쪽앞과 뒤로 나눠주는얼마나 큰가 광장을 이루는 불꽃들은놀라워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별이 뜨나니찬란하다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노래하네위대하다 별들의 반짝이는 평화는시대의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증거하는우리들의 촛불은 - 증거하는 별 / 박남준 꼭 1년 전 이날 밤이었다. 자고 있는데 아내가 다급히 깨우면서 빨리 TV를 보라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연설하는 윤석열을 배경으로 '비상계엄 선포'라는 굵은 자막이 떠 있었다. 내가 뱉은 첫마디는 "미친놈 아녀?"였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조바심의 시간 속에서 윤석열..
단식 존엄사란 자발적으로 식음을 중단함으로써 존엄하게 죽음을 맞는 행위를 말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더 이상의 의료 처치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 단식 존엄사는 안락사가 불법인 현실에서 환자가 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다. 소뇌실조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대만의 한 할머니가 더 이상 삶이 의미 없다고 여기고 단식 존엄사를 결심한다. 이 책 는 할머니의 딸인 비류잉이 어머니가 단식 존엄사를 이행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글로 남긴 것이다. 실화인 만큼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하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자연사라고 하면 대부분이 아사와 탈수에 해당한다. 집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음식을 드시지 못해서 숨이 끊어지셨다. 단식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