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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13, 14)

4부의 시작인 이 두 권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고착화되면서 지식인들은 좌절하고 패배 감정에 젖게 되는 시기다. 처세를 위해 친일에 영합하는 부류도 많이 생겨나고, 민중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13권의 서두에서는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을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타파를 외치고 민족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 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 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 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히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

읽고본느낌 2025.02.23

배우의 죽음

김새론 배우를 처음 안 건 10여 년 전 영화 '여행자'를 통해서였다. 영화에서 김새론은 해외입양을 기다리며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진희 역을 맡아 진한 감동을 주었다. 어린이임에도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연기로 나중에 대배우가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고, 이 배우를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6일에 김새론 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한창 뻗어나갈 25살의 아까운 나이였다. 보도로는 3년 전 음주운전 사고로 작품 활동이 중단된 후 악플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한다. 짧은 보도만으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실수를 한 인간에 대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그렇다고 음주운전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

길위의단상 2025.02.22

어느 하루

일주일에 한 번 분당에서 당구 모임이 있다. 이날은 일부러 목적지보다 대여섯 정거장 전에서 버스를 내린다. 걷기 위해서다. 천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좋은 산책로가 있는데, 매번 이 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30여 분 걸을 뿐이지만 나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당구는 11시부터 시작한다. 회원은 아홉이나 보통 대여섯 명 정도 모인다. 두 테이블로 나누어 4구와 3쿠션 게임을 한다. 나는 하수지만 주로 3쿠션을 친다. 수지는 몇 년째 10이다. 작년에는 책과 유튜브를 보면서 연구를 했지만 별 진척이 없다. 공 다루기가 당구만큼 어려운 종목도 없다. 나이 들어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한다. 이젠 실력이 느는 건 포기했다. 그저 즐기기로 하니 마음이 편하다. 오후 2시경..

사진속일상 2025.02.21

노예 12년

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책으로 읽었다. 뉴욕주에서 살던 솔로몬 노섭이라는 자유인 신분의 흑인이 있었다.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중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남부로 팔려가고, '플랫'이라는 새 이름으로 12년간 여러 주인을 거치며 끔찍한 노예 생활을 한다. 고통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탈출을 계획하던 중 백인 의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루이지애나 주의 목화밭에서 구조되는 이야기다. 1853년에 노섭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인 을 써서 노예 제도의 문제점과 노예들의 비참한 실정을 고발했다.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 10년 전이었으니 노섭의 이 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화로 대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 읽으니 훨씬 실감나면서 야만적인 노예 제도의 실..

읽고본느낌 2025.02.21

수동리 팽나무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가 4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에 있는 이 팽나무다. 안내문에는 우리나라 팽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고 적혀 있다. 나무 높이는 12m, 줄기 둘레는 6.6m, 나뭇가지가 펼쳐진 너비는 26m에 이른다. 수령은 400여 년으로 추정한다. 이 팽나무는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자 마을을 지켜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예전에는 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골을 따라 들어온 배가 이 팽나무에 밧줄을 감아 정박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주변이 너른 평야로 변해 있다. 팽나무가 위치한 곳이 인가에서 조금 떨어진 얕은 언덕 위다. 주위에는 다른 큰 나무가 ..

천년의나무 2025.02.20

모양성 용트림소나무

고창 모양성 안에 맹종죽림(孟宗竹林)이 있다. 맹종죽은 1938년에 유영하 선사가 불전의 포교를 위해 절을 지으면서 심었다고 한다. 맹종죽림과 송림의 경계에는 일부 소나무가 대나무과 얽혀 자란다. 대나무 사이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 모습이 승천하기 위해 용트림하는 것 같다. 이 광경을 보면서 '적대적 공생'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하늘을 가리는 대나무가 얄미웠을 것이다. 대나무는 소나무의 생명력을 전투적으로 부추겼고, 소나무가 승천의 꿈을 꾸게 만들지 않았을까. 소나무와 대나무는 이제 둘도 없는 동반자가 된 듯싶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빚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천년의나무 2025.02.19

전주, 군산, 고창

전주 구시가지에는 6, 70년대에 지은 단독주택이 많이 남아 있다. 일부는 빌라나 다세대주택으로 변했지만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 상당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할 여력이 안 되는 동네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유명하지만 특정 지역일 뿐이고 대부분은 시멘트로 지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골목길을 걸으며 옛집들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담장 너머로 작은 마당이 있으며 대개 유실수 몇 그루가 지붕까지 닿아 있다. 벽이 도로에 맞닿아 옹색한 집도 있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어수선해 보여도 사람 살아가는 향취가 느껴진다. 전주의 골목길을 산책한 이른 아침이었다.  장모님이 소환해서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파티가 열렸고, 하사하는 금일봉을 받았고, 밤늦게까지 시..

사진속일상 2025.02.19

좋을 대로 해라 / 김규동

천상병이 좋아한 것은 막걸리공초 오상순은 그저 담배문익환이 사랑한 것은 반독재 집회김정환은 철학과 맥주에즈라 파운드가 좋아했던 것은 시경말로가 흠모한 것은 영웅이다정지용이 사랑한 것은 말을 만드는 일과 염소수염이상이 그리워한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이병기가 사랑한 것은 난초김기림은 지성을권정생이 사랑한 것은 길가의 민들레꽃김남천이 사랑한 것은 노동자 농민이고임화가 사랑한 것은맨발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아이들이다여운형이 가장 좋아한 것은 대중을 만나는 일손기정이 좋아한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김구가 사랑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얘들아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집에서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아너무 괴로워하지는 마라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그것만이 너 자신을 살리는 길이니라천재는 거기 있다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

시읽는기쁨 2025.02.15

최선의 삶

이런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도 있구나,라고 가슴 아프게 읽었다. 범생이로 보낸 나로서는 전혀 다른 세상을 대하는 충격이 컸다. 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생 때 가출하고 고등학교는 중퇴해서 24세 때 한예종에 들어간 작가의 이력이 소설의 구성과 비슷하다. 임솔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작가가 방황하던 16살 때부터 10년간 써 온 소설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놓지 못한 것은 글로 드러냄으로써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가가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기를 바란다. 소설은 강이, 아람, 소영 세 소녀의 심한 성장통에 시달린 중고등 시절 이야기다. 강이는 뚜렷한 이유 없이 친구 따라 가출해서 험..

읽고본느낌 2025.02.14

경안천 버들(250211)

경안천에서 가장 애호하는 장소가 된 이유는 이곳에 '나'의 나무, 경안버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내가 좋은 둑방길을 버리고 강변으로 내려가는지 모른다. 다정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가능하면 가까이에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대와 나 사이에는 강물이 가로막고 있다. 마음 놓고 건너갈 수 있을 정도의 꽝꽝 얼음이 어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겨울인가 그런 때가 있기는 했으나 몇 걸음 떼어놓다가 겁을 먹고 되돌아섰다. 사랑은 용기라고 하는데 이러다가는 짝사랑만 하다가 끝날지 모르겠다. 나의 나무여, 오늘도 안녕!

천년의나무 20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