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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오시는 동네를 산책하다

봄 오시는 발걸음이 느리다. 시베리아의 한기가 늦게까지 한반도를 덮고 있었던 탓이다. 꽃 피는 시기가 예년에 비해 한두 주는 늦는 것 같다. 덩달아 세상살이에도 냉기가 걷히지 않고 있다. 우리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와 인류애라는 가치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실감한다. 그래도 때가 되면 봄은 온다. 자연의 철리는 어김이 없다. 내복을 벗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밖에서 놓아먹이는 닭을 만났다. 장닭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가 흙을 파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자유롭고 기운찬 모습이 반가웠다. 특히 장닭의 기세는 지구를 떠받칠 듯 늠름했다. 셋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꼬꼬 거리며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닭장 안이 아니라 이렇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닭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

사진속일상 2025.03.09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이름 모를 새들이 이미 다 읽었다고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저마다 머금을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 산창을 열면 / 조오현  을 접하지는 못했으나 '화엄세상'이란 말은 자주 들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장엄하게 빛나는 세상'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화엄'하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구슬로 된 인드라망이 떠오른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홀로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개체는 개체가 아니고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

시읽는기쁨 2025.03.08

티격태격하면서

부부는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간다. 노년이 되어도 다르지 않다. 젊었을 때보다 빈도나 강도가 줄어들 뿐이다. 그저께는 아침 식탁에서 아내와 하찮은 일로 입씨름을 했다. 그러고는 감정이 상해 입을 닫았다. 차분하게 대화로 풀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잘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침묵이 나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침묵하면서 둘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연민에 닿는다. 연민은 너나 나나 모두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 오는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에 대한 원망도 봄눈 슬듯 사라진다. 또한, 나보다 상대가 받은 상처가 어떠했을지를 헤아리게 된다. 연민은 용서보다 힘이 세다. 부부간의 마찰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적절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삶에 활력을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추어탕에..

참살이의꿈 2025.03.07

토지(15)

15권은 4부의 마지막 권이다.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 후반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어 남경 학살이 벌어지면서 세계대전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시기다. 국내 정세도 전시 분위기로 바뀌면서 폭압이 심해진다. 그와 함께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조선인들의 고투도 이어진다. 고향에 내려온 길상은 은인자중하며 지낸다. 서희와 두 아들이 있기에 함부로 앞장설 수도 없다. 이 시기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이 있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인 배화(排華) 폭동이 일어났다. 만주에서 일어난 중국과 조선 농민의 충돌을 조선일보가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국내에서 화교를 습격하고 학살하는 만행이 일어난 것이다. 일제의 농간에 놀아난 참극이었다. 군중들이 얼마나 쉽게 사악한 정치 세력들에 ..

읽고본느낌 2025.03.05

임계장 이야기

제목에 나오는 '임계장'이 직책인 줄 알았더니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어서 씁쓰름했다. 이 책은 공기업에서 퇴직한 후 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조정진 씨의 노동 일지다. 그는 버스 회사 배차계, 아파트 경비원을 거쳐 빌딩 주차 관리 및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그를 힘든 노동 현장으로 내몰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동네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아파트 경비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게 되었다.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딴판의 현실이 숨어 있었다. 노동의 강도만 아니라 관리사무소나 입주민 사이에 생기는 심적 갈등이 그분들을 힘들게 했다. 소수지만 어디에나 못된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만 횡포를 부리거나 갑질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임시계약직은 좋은 먹잇..

읽고본느낌 2025.03.04

오우가 / 윤선도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 또한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아마도 변치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 한 것 또 있겠는가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 오우가(五友歌) / 윤선도  꽃을 품평하여..

시읽는기쁨 2025.03.03

사기[38]

고조가 직접 나서서 진희를 치려고 하자, 주설이 울면서 말하였다."일찍이 진나라가 천하를 칠 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간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언제나 직접 나가시는데 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십니까?"고조는 '나를 아끼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궁궐 문을 들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고,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특전을 내렸다.효문제 5년에 주설이 타고난 수명을 누리고 죽자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 사기(史記) 3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이 편은 유방을 보좌한 세 명의 장군(부근, 근흡, 괴성후/주설)에 대한 짧은 전기다. 셋 중에서 주설(周緤)은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평생을 유방 곁에서 주군을 지킨 사람이다. 그는 유방이 싸움터에 나갈 때마..

삶의나침반 2025.03.02

양양, 속초 여행(2)

방음이 잘 안 되어 잠을 설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밤 10시가 넘으니 시끄럽던 옆방도 조용해져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온돌방 바닥도 따스했다.  일어나서 리조트 15층에서 바라본 영랑호 주변의 속초 풍경이 아스라했다. 아침 해는 빌딩 사이로 솟아오른 뒤였다.  리조트에서 나오는 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바로 영랑호를 걸었다. 역시 바닷가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부는 해풍이 차고 거셌다. 그럼에도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랑호 풍경은 아름다웠다.  원래는 한 바퀴를 돌 생각이었으나 날씨가 망설이게 했다. 결국 반 바퀴만 도는 것으로 수정했다. 산책로를 따라 벚나무가 도열해 있는데 봄에 오면 참 멋질 것 같다.  이번에는 범바위에 올라가 보았다. 위에는 거인의 공깃돌 같은 바위들과 영랑정(永郞亭)이 있었다. ..

사진속일상 2025.03.01

양양, 속초 여행(1)

아내와 2박3일로 양양과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은, 양양으로 가서 남대천을 걸었다. 2월 하순이지만 바닷바람이 너무 거세고 차가워서 오래 걷지는 못했다. 대신에 양양 5일장이 서는 날이라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이어서 하조대해수욕장을 찾았다. 하조대전망대에서 바다 풍경을 구경하고, 백사장을 밟으며 산책을 했다.  4시쯤 낙산비치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낙산해수욕장과 동해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젊었을 때 낙산에 놀러 오면 늘 바닷가 민박이나 모텔에 묵었다. 언덕 위에 있는 하얀색의 비치호텔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기에서 잠잘 때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제야 이루어졌다.   객실에서 바다 일출을 보았다. 운좋게 오메가 일출을 보는 행운이 찾아왔다.  호텔에서 뷔페식 조식을 먹고 바로 옆에 ..

사진속일상 2025.02.28

낙산사 복수초(25/2/25)

길게 이어지는 2월 추위로 전국의 봄꽃 개화 시기가 늦다. 낙산사 복수초도 다른 해에 비해 늦은 편이다. 아직 꽃봉오리 상태인 개체도 눈에 띈다.  낙산사를 찾은 날은 춥고 바람이 거셌다. 강풍주의보까지 내려졌다. 꽃잎을 열었지만 복수초도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듯하다. 차가운 눈을 뚫고 꽃을 피우는 복수초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예년 같으면 만개해서 끝물이 되었을 시기다. 다른 지역 복수초도 예년 같은 싱싱함은 보여주지 못한다. 날씨 변화는 요량하기 힘들다. 날씨만큼이나 시국도 얼어붙고 뒤숭숭한 이즈음이다. 그래도 봄은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리라. 자연의 순리에 거역할 힘을 누가 가지고 있으랴. 한 달 뒤에는 온누리에 대자연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