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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아침 일찍 산에 오른다. 숲은 한 밤의 정적이 아직 남아있어 신비감이 든다. 가끔씩 부지런한 새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나무 줄기 사이로 사선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숲을 뚫고 들어온다. 아직 사람의 발자국이 묻지 않은 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간다. 길 옆의 야생화도 잠에서 깨어나 이슬로 세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꽃들은 아직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이른 아침의 꽃들은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훨씬 더 순수하고 청순해 보인다. 신발과 바지 밑자락은 축축해질지라도 꽃들과 첫 인사를 나누는 기쁨이 더 크다. 둥굴레가 이슬에 함빡 젖은 채 수줍은듯 잎사이에 숨어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는 꽃이다. 그러나 몸을 낮추고 ..
서울에 살지만 도심에 나가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지하철로 이동하기 때문에 지상의 풍경을 보기란 무척 드물다. 그래서 가끔씩 마주치는 서울의 모습이 낯설 때가 많다. 뭐가 그리 쉽게 자주 변하는지 서울 시민이지만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은 며칠 전에 개장했다는 서울 광장을 보고 싶어서 작심하고 시청 앞으로 나가 보았다. 초록 잔디가 시원하게 깔려 있어서 우선 시각적으로 밝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전체 모양은 타원형이라지만 잔디 위에 있으면 너무 넓어서인지 그 윤곽이 들어오지 않는다. 잔디 위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한가로운 평일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와 평화가 느껴진다. 그리고 온통 빌딩으로 둘러싸인 사방과 대조되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나 벤치같은 ..
제비꽃은 피었는데 제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제비를 못 본지가 몇 년이 된 것 같다. 옛날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강남에서 찾아온 제비들이 논밭 위를 날렵하게 날아다니고 마당의 빨래줄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가 시작될 때이다. 시골에서 자란 중년의 연배라면 제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제비는 참새나 까치보다도 더 우리와 친근한 새였다. 그것은 사람과 동거하는 습성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흥부전을 통해서 은혜 갚는 새로 우리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제비는 시골 초가집의 서까래와 벽 사이에 집을 지었다. 대부분의 새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건만 제비는 사람 집에 일부러 찾아들어 온다. 그런데 하필 집 짓는 곳이 사람들이 들고나는 문 위일 경우..
마가리에서 만난친구가있다. 만난지는 채 3년이 못되지만 지금은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소중한 친구이다. 만나게 된 계기도 재미있는데 하여튼 이 친구는 마가리가 나에게 준 귀한 선물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메일을 많이도 주고 받았다. 지금은 뜸하지만 그간 오고간 메일이 4백통 가까이 되니 적은 양은 아니다. 그렇게 서로 통하는 얘기가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이 메일이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며 자랑이다. 지금도 클릭해서 읽어보면 옛 생각이 나면서 힘을 얻게 된다. 이 친구는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이다. 나는 내성적이지만 친구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늘 에너지로 넘친다. 그의 곁에 있으면 내면에서 분출하는 기라고 할까 에너지라고 할까 뭔가가 꿈틀거리는 생기로 가득해진다.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 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나의 행운이다 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
삶이 외롭고 힘들 때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가 있나요? 어제 오후에는 서해안의 외진 곳, 신두리 사구(沙丘)를 찾아갔다. 신두리 사구는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모래 언덕이라고 하는데, 약 1만년여에 걸쳐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안가를 따라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모래 언덕이 바다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구 위에는 여러 종류의 키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는데 동식물이 관련된 생태적으로도 소중한 장소라고 한다. 저녁 무렵, 이 인적 드문 사구에서 바다를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어울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어떤 마음의 아픈 상처라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쓸쓸한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
작년 가을에 이웃에서 꽃잔디 몇 줄기를 꺾어다 집 주위에 심었다. 그 당시 상황이 무척 힘들었을 때라서 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도 못했는데 겨울이 되니 새까맣게 말라 버려서 죽었는가 보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 되니 어느 날 갑자기 한 무더기의 꽃을 피어 올렸다. 이걸 보니 작은 풀꽃에 불과할지라도 그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꽃을 보면 희망을 떠올린다. 또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나 작은 풀꽃에 들어있는 이런 생명력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인간 속에도 내재하는 생명력과도 동일하며 서로 통하고 있다고 본다. 이 우주는 생명의 바다이다. 어느 책에서 한 스님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태백산 깊은 암자에서 수행하시던 분인데, 늘 새들이..
비 내리는 월요일이다. 사람의 마음도 날씨따라 가라앉고 우울해진다. 이런 날은 기분 전환을 위해 깔깔 웃는 꽃인 현호색을 불러내 본다.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8년전 어느 날 봄, 꽃을 좋아하는 분의 권유로 축령산으로 난생 처음 야생화를 보러 따라 나섰다. 그 날 맨 처음 만난 몇 가지 꽃들 중에 현호색이 있었다. 너무 작아서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고 말보라색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대개 앞만 바라보고 걷지만, 발 밑에도 이렇게 예쁜 보물이 있다는 걸 처음 깨우쳐준 꽃이었다. 그 뒤로 현호색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는 걸 알았고, 많은 군락지들을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봄이면 주위에 엄청나게 많이 피어났다. 이렇게 많은 꽃을 그동안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많은 사..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이젠 잊어버린 고향 집을 떠나 와서 어딘가로 가고 있는 나그네들이고 순례자들이다.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길 위에 올라섰으니 무작정 걷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언가의 꿈을 쫓아 아니면 신기루에 희망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어느 길 모퉁이에서 남은 여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어진 신발에 다리를 절뚝이며 자꾸만 뒤쳐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런데 여기, 생명평화를 위한 탁발순례의 길에 나선 분들이 있다. 지난 3월에 지리산을 출발하여 3년 계획으로 전국을 순례하며 생명평화의 기운을 일으키려는 도법과 수경, 두 분의 스님이시다. 그리고 이분들 뜻에 동참하는 여러 사람들도 동행하..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작년에 대학로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아직 소녀같은 얼굴과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음 비우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원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