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147

유유히 뒷산

뒷산에 가을물이 들기 시작했다. 계절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지만 산에 들면 느리고 유유하게 찾아온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 오시는 산길을 자연의 리듬 따라 나도 유유하게 걸었다. 그러고 보니 '유유하다'는 말이 참 좋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노년은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유유하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사에 어느 정도 초연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니 변화에 거역하지 않는다. 순리로 받아들이면 시달릴 일이 줄어든다. 괴로움은 외부가 아닌 내 마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종착점은 장자의 목계(木鷄)가 아닐까. 불교의 무아(無我)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서 '내'가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삑 삑 삑삑~" 산길에서는 청딱따구리의 노래가 연신 들려..

사진속일상 2024.10.17

행복이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다.터키의 한 시인이 화가 친구에게 행복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화가 친구는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든 한 가족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얼마나 가난한지 천정에서는 비가 새고 있고, 침대의 한쪽 다리도 부러져서 벽돌로 받쳐 놓았다. 그런데도 부부와 여섯 자녀들은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침대 위에는 개와 고양이도 끼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옹기종기 어울려 같이 자고 있다.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행복은 문제가 없는 것에서가 아닌, 문제가 있는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나쁘더라도 내가 가진 것, 내가 처한 곳에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세요. 당신이 통제할 수 없..

참살이의꿈 2024.06.15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

이근후 선생의 5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사 제목에 나온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1935년생이니 지금은 9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선생은 건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 쓰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계시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인생은 고달프고 행복은 신기루다. 쉽게 사는 사람은 없다. 겉모습은 화려할지라도 속내는 누구나 쓰라리다. 다만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아갈 뿐이다. 원한이나 분노, 불안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작은 재미로 덮어둔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슬픔을 잊고 가능한 한 재미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조다. 평생을 인간의 아픔과 마주한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한 귀결일..

참살이의꿈 2024.02.21

우울한 한국

미국의 인기 작가이자 유튜버인 마크 맨슨이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가 '우울한 한국'이라는 주제로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되어서 찾아보았다. 마크 맨슨이 내린 진단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종합적으로 짜깁기해 놓은 느낌이 들었다. 영상 제목이 '나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I Traveled to the Most Depressed Country in the World]'로 자극적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자살률인데 한국은 10만 명당 25명이 자살하여 OECD 국가 중 최고로 높다. 특히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낮은 출생률 또한 우울한 한국을 드러내주는 징표다. 마크 맨슨은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며..

참살이의꿈 2024.02.06

낮의 목욕탕과 술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떠 있을 때의 목욕과 술에 대한 예찬이다. 이런 소재로 재미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에서 즐길거리는 사방에 널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은이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본의 만화가로 도쿄와 근교의 오래된 목욕탕을 순례하는 복고풍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목욕 후 마시는 낮술의 달콤함도 빠질 수 없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 최고×최고, 그게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암, 그렇고말고. 이히히히...

읽고본느낌 2023.11.07

나의 행복 /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돈은 아내가 벌고 나는 놀면서 지내니까!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딱 싫고 그저 KBS 제1FM방송. 이 방송은 거의가 고전음악인데 고전음악광인 나는 그래서 행복의 진짜 맛이다. 막걸리 한 되 한 병을 매일같이 마누라가 사준다. 한 병을 정오에 사면 6시까지 가니 어찌 탓하랴?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거리랑 없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어기겠습니까? 행복은 충족이다. 나 이상의 행복은 없고, 욕망이라고는 없으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행복 / 천상병 시인의 나이 쉰셋이면 1982년에 쓴 시로, 의정부 장암동에 있던 허름한 집에 살던 시절이다. 여느 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다. 천상병표 행복..

시읽는기쁨 2023.07.26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스위치 누르자 전등 켜져 밝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 잘 나온다 냉장고에 일용할 음식의 한 가족 살고 작동 즉시 전율 휘감는 음악 한 그루 나무에도 공생하는 새와 곤충들 있어 저들 숨쉬는 허파와 그 심장 피주머니 숙연하다 그람자 한 필 드리우는 구름과 지척에 일렁이는 바람 손님들 이즈음 왜 이런지 몰라 사는 일 각별히 소중한지 몰라 모든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준령 오르고 있으리 눈물 말리며 걸으리 그러한 이 세상 참 잘 생겼다고 왜 문득 가슴 움켜잡는지 몰라 -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아침에 텃밭에 나가 고랑을 정리할 때 까맣게 생긴 곤충 한 마리가 뽑힌 풀 사이로 기어가고 있었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찮게 보이는 미물이어서일까, 살아가려는 생명의 움직임이 더욱 애잔하면서 숙연했다..

시읽는기쁨 2023.06.17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김형석 선생은 1920년생이니 103세가 되신다. 여전히 저술과 강연 등의 활동을 하는 노익장이 대단하시다. 선생은 우리들 대화 자리에서 노년의 본보기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이시다. 물론 이런 하늘이 내린 혜택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 선생이 행복을 소재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선생의 글은 평이하고 담백하다. 선생의 성격과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삶의 기본이 되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초등학생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에 담겨 있다. '약간 우울한 이야기'라는 글에서 선생은 늙는다는 것은 생활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나이가 들 수록 사회 공간은 없어지고, 활동 영역이 가정 공간으로..

읽고본느낌 2023.06.16

한평생 /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고 지음도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뿐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 한평생 / 반칠환 본디 짧고 긴 것이란 없다. 짧다고 보면 짧은 것..

시읽는기쁨 2023.06.01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화장실 세면대 옆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9년 전에 친구가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며 기념으로 준 수건이다. 아랫단에 친구 이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세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어렵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현재에만 충실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 일이 발목을 잡아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간다. 반면에 동물은 단순하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매여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리 두 마리가 연못 위에서 직각을 이루는 물길을 따라오다가 충돌했다. 이내 꽥꽥 소리와 푸드덕 날갯짓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두 오리는 서로 떨어져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네가..

참살이의꿈 2023.04.18

재미를 버릴 때 찾아오는 재미

교직에 있을 때 나를 괴롭힌 건 선생 노릇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사는 -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부모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할수록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았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보람을 느끼거나 재미있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저 버텨냈을 뿐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삶이 재미없었던 제일 큰 이유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동물이다. 무슨 일을 하건 의미/명분이 있어야 열정이 생기고 재미도 느낀다. 아니면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오락이나 쾌락이 위안을 주지만 일시적 도피일 뿐이다. 근원적인 해결 없..

참살이의꿈 2023.02.15

행복호 / 윤보영

가을 타세요? 그럼 타세요 사랑으로 밀어드릴게요 - 행복호 / 윤보영 '타다'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사전에 나온 설명은 이렇다. 타다 1. 탈것이나 짐승의 등 따위에 몸을 얹다. 2. 불씨나 높은 열로 불이 붙어 번지거나 불꽃이 일어나다. 3. 몫으로 주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받다. 4. 다량의 액체에 소량의 액체나 가루 따위를 넣다. 5. 먼지나 때 따위가 쉽게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다. 6. 부끄럼이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나 간지럼 따위의 육체적 느낌을 쉽게 느끼다. '가을을 탄다'라고 할 때의 '타다'는 6번의 의미이고, 시의 제목으로 쓰인 '행복호'는 1번의 의미로 쓰였을 테다.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용한 재미있는 시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계절 변화로 나타나는 우울증을 가리킨다. 기온이 떨..

시읽는기쁨 2022.11.01

지적 행복론

"소득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돈이 많으면 정말 더 행복해지는지 알아보고자 데이터를 연구했고, 이 데이터는 행복과 소득의 역설을 보여줬다. 이스털린은 행복통계학을 연구한 최초의 경제학자다. 이 책 은 97세의 이스털린이 쓴 행복에 관한 보고서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 내용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이다. 다만 그의 이론은 과학적 조사에 의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하기 때문에 바탕이 탄탄하다.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우리가 행복에 접근하는데 유리한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인간 행복의 조건은 소득, 건강, 가정생활의 세..

읽고본느낌 2022.10.11

기대 없음의 행복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대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다중(多衆)보다는 고독이라고 되새김질하는 자체가 이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DNA에는 무리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야생 상태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홀로 있으면 스트레스가 작동하도록 하는 명령어에 불이 켜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때 기본적으로 기쁨을 느낀다. 야생의 위험이 사라진 지금도 인간은 소속감을 통해 안전과 위안을 ..

참살이의꿈 2022.09.21

조심스레 산책하다

허리가 결린 지 일주일째다. 차도가 아주 느리다. 어제는 밖으로 나가 마을 주변을 조심스레 산책했다. 올해 후반부는 너무 어렵게 시작된다. 8월에는 코로나로 두 주일, 9월 지금에는 허리 통증으로 한 주일 넘게 힘들어하고 있다. 연례행사로 잊지 않고 날 찾아오는 병이 셋 있다. 감기, 허리 결림, 어지럼증이다. 셋의 공통점은 예고도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번 허리 결림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전 아침에 일어났더니 허리가 뻐근하며 몸을 제대로 굴신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꿈을 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심하게 뒤척이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었다. 얼마 전의 꿈에서는 상대와 싸우다가 실제로 발차기를 하는 바람에 침대에 부딪힌 소리에 놀라 아내가 달려오는 소동이 있었다. 감기..

사진속일상 2022.09.15

부탄, 행복의 비밀

"첫눈이 오면 학교나 일터로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낭만을 즐긴다. 모든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아이를 낳으면 6개월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고, 아이가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근로시간을 하루 2시간 줄여준다. 전 국토의 70%를 숲으로 보전한다. 고을마다 며칠씩 전통 축제가 열린다." 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부탄은 면적이 39,000㎢(한반도의 1/3), 인구가 80만,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인 아시아의 가난한 소국이다. 부탄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유명하다. 부탄은 국가 운영의 첫째 지표가 경제 성장이 아닌 행복이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

읽고본느낌 2022.09.13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은행원 리카가 연하남 애인과 불장난을 하면서 고객 돈을 횡령하는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줄거리인데, 돈에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리카 외에도 여러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돈에 휘둘리는 군상들이다. 지리하고 우울한 삶을 소비로 만족하려 하지만 돈은 잠깐의 단맛을 줄 뿐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기승전'돈'일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 슬프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행복하지 않다. 예외적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살아가는 유코도 마찬가지다. 돈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돈에서 멀어지려 하지만 그럴수록 돈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돈을 마구 써대도 아껴도 돈에서 벗어나지..

읽고본느낌 2022.08.25

혼자서 잘 놀아야 노후에 행복하다

뇌리에 새겨진 한 장면이 있다. 40대였을 것이다. 직장 동료와 시골길을 걷다가 외딴 초가집 마당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나직이 말했다. "저렇게 늙는 건 비극이야. 난 저렇게는 안 되겠어."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외로움과 노년의 고단함이 묻어나기는 했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노인이라고 불쌍한 연민의 대상이기만 한 걸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나름의 자족의 행복이 있지 않을까. 나는 할아버지한테서 여유와 편안함을 읽었지만 동료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타인과 공유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수많은 인터넷 카페나 단톡방, 각종 SNS에서 넘쳐나는 사연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

참살이의꿈 2022.07.23

텃밭이 주는 선물

아침 식탁은 텃밭이 주는 선물로 가득하다. 일찍 일어난 아내가 - 그래도 7시가 넘어서지만 - 텃밭에 나가 푸성귀를 거둬 온다. 오늘은 고추, 가지, 호박, 호박잎, 토마토를 따 왔다. 미리 캔 감자와 아욱으로 끓인 국도 있다. 100% 텃밭에서 난 반찬이다. 바로 뜯어온 야채의 싱싱함이란 시장에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입맛이 저절로 돋는다. 식탁에 올린 것은 싹 다 비운다. 남은 토마토와 감자는 오가면서 하나씩 집어먹으면 된다. 이런 게 소확행일 거다. 표현은 못 하지만 매일 한두 번씩은 꼭 텃밭에 들리는 아내에게 고맙다. 가꾸고 수확하는 재미를 나는 짐작만 할 뿐이다. 텃밭 일을 도와달라고 할 때 더는 투덜대지 말아야겠다.

사진속일상 2022.07.11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와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시읽는기쁨 2022.07.10

숲의 즐거움

우석영 선생의 숲에 관한 철학 산문집이다. 숲을 산책하며 느끼고 사유한 사색의 단상들이 묵직한 무게로 담겨 있다. 숲은 '수풀'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수풀은 '수(樹)'와 '풀'의 합성어다. 숲은 나무와 풀만 아니라 온갖 생물이 살아가는 다(多)세계의 총합이다. 또한 숲은 여러 삶의 주체들이 각자의 삶을 공생의 문법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집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 태초의 고향인지 모른다. 우리는 숲을 거닐며 마음의 고요를 회복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은 숲 산책의 행복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몇 새로운 단어를 발견해서 기뻤다. 그중 하나가 '유산(遊山)'이다. 옛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산의 숲길을 거니는 일을 유산이라고 불렀다. 거니는 전통이 소멸되면서 지금은 유산 ..

읽고본느낌 2022.05.12

이제 행복할 시간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불행과 행복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숱한 불행과 드문 행복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믿었던 친구의 배신, 타인에 대한 집착, 서로에 대한 오해 등 관계에서 오는 불행. 아픈 몸, 경제적 어려움, 불규칙한 생활, 밥벌이의 고단함, 일상의 권태 등 상황이 주는 불행. 걱정, 불안, 질투, 증오, 두려움, 죄책감, 자기 연민 등 온갖 감정이 일으키는 불행. 하다못해 날씨가 더워도, 길이 막혀도, 주위가 시끄러워도 삶은 괴롭다. 불행할 조건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서 인생의 기본값이 불행일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불행 때문일까? 불행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참살이의꿈 2022.05.04

행복한 외톨이

외톨이는 어감이 좋지 않다. 왕따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타인이야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혼자의 자족을 즐긴다면 그 또한 멋진 인생이 아니겠는가.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외톨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오히려 외톨이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좋다면 굳이 밖에서 찾으려고 쏘다닐 필요가 없다. 무리를 짓고 어울리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있다. 인생에서 친구와 돈이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다. 그런 사람에게는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비극일지 모른다. 시간 낭비일 망정 마시고 떠들어야 사는 맛이 난다. 지나고 나서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순간의 쾌락이지 내면의 참 행복은 아니다. 일과 인간관계를 무시하자..

참살이의꿈 2022.04.17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행복 / 심재휘 강릉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지인이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내온다. 강릉에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가 참 많은 것 같다. 지인은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약간은 질투가 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차용하여 속으로 중얼거린다. "매일이 보람 있고 행복하다면 그 역시 힘겹지 않겠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날도 있어..

시읽는기쁨 2022.03.15

웃으면서 비관

언젠가 밤에 차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선 고층 아파트의 창마다 켜 놓은 불빛이 환했다. 나는 저 집들마다 어떤 기구하고 아픈 사연들이 있을까, 라며 착잡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불빛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지인이 말했다. "와, 불빛이 꽃처럼 예쁘다. 창 너머 가족의 단란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똑같은 불빛을 보는 마음의 눈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 나는 지인의 옆얼굴을 부러워서 쳐다보았다. 반이 남아 있는 술잔을 보며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아 있다"라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다"라고 슬퍼한다고 한다.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에 따라 현상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 인간에게는 행복 유전자가 있고 개인에 따라 타고난 양이 다르다고 한다. 인간..

참살이의꿈 2022.01.17

제라늄의 미소

벌써 10년째, 사시사철 고운 미소를 잃지 않는 네가 경이롭다. 그렇다고 정성으로 돌보는 것도 아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가끔 물 주고, 분갈이 안 한 지는 까마득해서 언제였는지도 모른다. 강산이 바뀔 세월이 흘렀는데도 너는 변함없이 밝은 미소를 띠고 있구나. 너에게야말로 '반려'라는 말을 붙여주고 싶다. 제라늄이 여러해살이 식물이라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자라는지 궁금하다. 줄기 아랫 부분은 이미 딱딱한 목질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곧 널 만나고 어느덧 10년, 그 긴 기간 동안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추운 겨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결같은 네 미소 앞에서 어찌 우울할 수 있으랴. 비 내리는 쓸쓸한 초겨울이지만, 네가 있어 행복한 오늘이다.

꽃들의향기 2021.11.30

손주와 고구마 캐기

텃밭에 심은 고구마를 캤다. 진작부터 고구마 캐기를 기다리고 있던 손주도 부리나케 달려왔다. 좁은 텃밭에 심은 고구마라야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도 고구마가 목적이 아니라 고구마순을 먹기 위해서였다. 대략 쉰 포기 정도를 심어 놓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작물에 비하면 홀대를 한 것이다. 그래서 고구마 수확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씨알이 굵었다. 손주의 고구마 캐기 체험에 더해 얻은 망외의 재미였다. 고구마는 심어놓기만 했지 거의 제 스스로 자라준 것이다. 거름도 주지 않았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무시했는데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일할 때 옆에 손주가 있으니 활기가 난다. 두 노인만이면 무슨 웃을거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손주의 작은 손짓, 말짓 하나에도 추임새를 넣어주고 감탄사를 연발한..

사진속일상 2021.10.15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녁밥을 기다리던 수백 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가던 작은 개미와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 것들은 내 구둣발 밑에서 죽어갔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처럼 나도 ..

시읽는기쁨 2021.09.25

디오게네스의 자신감

고등학생일 때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전해 주는 여러 철학자들의 삶과 일화가 재미있었고, 그들의 명언이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제일 감명을 받았던 철학자는 디오게네스였다. 사람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다거나,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통쾌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에 속한다. '견유(犬儒)'란 '개 같은 선비(철학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명칭으로 들리지만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으니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리자 개처럼 한 발을 들고 오줌을 갈겨댔다는 일화가 전한다. '견유..

참살이의꿈 2021.09.21

교실 안의 야크

처음 만나는 부탄 영화다. 부탄이라고 하면 불교 국가면서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국민 행복을 국가 경영의 최우선에 두는 탓에 세계 행복도 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인 나라다. 이 영화의 주제는 역시 행복이다. 유겐이라는 젊은 교사가 부탄에서도 가장 외진 벽지 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일주일을 걸어가야 하는 해발 5천 미터 되는 '루나나'라는 산골 마을이다. 호주로 이민을 꿈꾸는 유겐인지라 처음에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유겐에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립된 오지 생활은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청정한 대자연 속에서 순박한 아이들과 주민을 만나면서 유겐의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교실 안의 야크'라는 제목대로 아이들이 수업을..

읽고본느낌 2021.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