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샌. 2022. 7. 10. 10:13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와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마을과 멀리 바위를 등에 업은 산맥이 들어왔다

산 중턱에 요란한 절과 반짝이는 교회 첨탑이 옥에 티지만

가끔 빗줄기와 눈발이 발을 쳐서 가려주었다

 

이 땅에 경치 좋고 인심 좋은 명당이 흔하겠는가

이게 인생 아니겠나

마음이 명당이면 되는 것 아니겠나

 

창을 낸 후 방 안은 매일매일이 유리 스크린 영화관이다

오늘은 직박구리 두 마리가

가지에 매달린 언 감을 쪼아 먹는 모습이 다정하다

러브씬도 은근히 기대해본다

 

-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유튜브로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충청도에 있는 고향집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 절에 얽힌 이야기 등으로 지은 시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시인의 낡은 고향집은 어머니 혼자 지내시다가 돌아가시고 빈집이 되었던 것 같다. 이 시에 나오는 집 역시 그 고향집이 아닌가 싶다.

 

나도 요즈음 내 한 몸 의탁해 쉴 수 있는 작은 집을 알아보고 있다. 몇 군데 돌아다녀 보았지만 내 조건과 맞아떨어지는 곳은 없다. 집이 마음에 들면 돈이 부족하고, 돈에 맞추면 다른 데에서 고개를 젓게 된다. 굳이 내 소유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임대 물건은 너무 희소하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집과 짝은 찾아가는 게 아니다. 때 되면 온다." 이 말을 핑계 삼아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내 모습은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과 같은지 모르겠다. 멀리 있는 장미만 쳐다보느라 내 오두막에 있는 민들레의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불평한다. 벽을 허물면 하늘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햇살이 쏟아진다. 시인의 말이 뜨끔하다. "마음이 명당이면 되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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