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의 행복 / 천상병

샌. 2023. 7. 26. 10:06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돈은 아내가 벌고

나는 놀면서 지내니까!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딱 싫고

그저 KBS 제1FM방송.

 

이 방송은

거의가 고전음악인데

고전음악광인 나는

그래서 행복의 진짜 맛이다.

 

막걸리 한 되 한 병을

매일같이 마누라가 사준다.

한 병을 정오에 사면

6시까지 가니 어찌 탓하랴?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거리랑 없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어기겠습니까?

 

행복은 충족이다.

나 이상의 행복은 없고,

욕망이라고는 없으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행복 / 천상병

 

 

시인의 나이 쉰셋이면 1982년에 쓴 시로, 의정부 장암동에 있던 허름한 집에 살던 시절이다. 여느 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다. 천상병표 행복이 뭔지 잘 보여준다.

 

천상병 시인의 사진집을 볼 기회가 있었다. 여러 사진 중에서 시인과 이외수 소설가, 중광 스님이 만나 파안대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뒤에 셋은 <도적놈 셋이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책의 인지대는 오막살이라도 지으라고 시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시인은 인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적 관행을 무시한 채 자유롭고 정직하게 살았다. 어린아이의 무구한 심성으로 사신 분이다. 위선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시인일 것이다. 늘 가난이 따라다녔지만 누구보다 부요하게 사신 분이었다. 막걸리 한 병이면 하루가 행복했으니까. 시인이 남긴 별스런 일화도 많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일화가 있다. 1965년에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고 나서 동아일보 최계락 기자가 시인에게 파병에 대한 소감을 써 달라는 원고 청탁을 했다. 원고료로 막걸리값이라도 하라는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이 쓴 원고의 요지는 이랬다.

 

"대한민국도 불쌍한 나라이다... 그런데 불쌍한 식구들이 억박적박 어르는 남의 집 싸움에 대한민국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나는 남의 집 싸움에 군대를 파병하는 불쌍한 나라의 지식인이다... 싸움의 경우를 알 만큼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월남 국민들에게 한없는 용서를 빈다."

 

이튿날 신문에 시인의 글이 게재되었다. 그러나 내용이 애초 원고와는 딴판으로 수정되어 있었다. 그대로 실었다가는 신변에 불안을 느낀 기자가 내용을 바꾼 것이다. 시인한테서 엄청 욕을 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시대정신이나 역사의식이 분명했던 시인이었지만 동백림 사건을 겪으면서 심신이 망가졌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우연히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어 세상으로 되돌아왔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럼에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 멋대로 버릇없이 살아온 탓으로 흔히들 나를 '기인, 기인' 하는데 나는 도무지 내가 왜 기인인지조차 모른다. 남들이 나를 기인이라니까 기인인가 할 뿐 나는 기인이 아닌 것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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