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145

나는 행복합니다

이 사나운 세상에서 그나마 주변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술에 적당히 취할 때다. 너무 과해도 안 되고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알맞다. 그 정도면 세상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단, 주변이 시끌벅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수다 가운데서는 그런 기분을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주신(酒神)을 영접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아내가 처가에 갔다. 같이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아내만 내려갔다. 며칠간 혼자서 지내게 되었다. 몇 가지 계획이 궂은 날씨로 틀어지고 외출도 못한 채 집 안에서만 보내고 있다. 하필 이런 때 미세먼지가 몰려오고 하늘까지 잔뜩 찌푸릴 게 뭐람. 그러나 외로움을 즐길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평상시에..

참살이의꿈 2021.03.13

필요한 하나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참살이의꿈 2020.12.14

다시 아침 / 도종환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은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르 차르르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다시 아침 / 도종환 시인이 마음을 정화하듯 하는 행위를 나 역시 집에서 일상으로 한다. 방 쓸기, 설거지와 밥 안치기, 초록에 물 주기, 빨래 개기 등은 퇴직 이후..

시읽는기쁨 2020.12.10

인투 더 와일드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문명을 박차고 나간 한 젊은이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신이 모은 돈 2만여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크리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 버린다. 영화는 'My Own Birth' 부터 'Getting Of Wisdom'까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리스는 노숙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본다. 길 위에서 만나 집시 부부나 농장의 일꾼과 우정을 나누고, 독거노인과 한동안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에 대한 충고도 듣지만 그 무엇도 크리스의 마음을 되..

읽고본느낌 2020.11.18

게으름을 자랑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행동이 굼뜨다. 어려서부터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부모님이 걱정했는데, 학교생활이야 그럭저럭했지만 군대에 가서는 고생 좀 했다. 훈련받을 때 선착순에서는 맨날 꼴찌여서 기합은 도맡아 받았고, 자대에 가서도 고참한테 어지간히 잔소리를 들었다. 나 같은 졸병을 둔 고참도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다행히 행정병이라서 그나마 군대 3년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활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만히 혼자 있는 게 특기다. 책 한 권만 던져주면 종일을 심심치 않게 보낸다. 바깥출입 없이 몇 달이라도 혼자서 재미나게 지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단점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남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하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다. ..

참살이의꿈 2020.09.09

다읽(4) - 유쾌한 행복론

사는 일이 납덩이를 안고 있는 듯 무거울 때 꺼내 보는 책이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답답한 가슴이 풀어진다. 인생이란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낸 관념이며 망상일 뿐이다. 누가 납덩이를 들고 있으라 한 적이 없다. 한두 꼭지만 읽어도 글쓴이의 생활 속 유쾌한 인생 철학이 나에게로 번져온다. 전체 제목은 이다. 글쓴이는 생활 속의 철학자요, 세계 동포주의자를 자처하는 전시륜(1932~1998) 선생이다. 서울공대 재학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도미해서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직장 생활과 글쓰기를 하며 살았던 분이다. 선생이 모국어로 쓴 유일한 책이 이 이다. "사람은 왜 사냐? 살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 ..

읽고본느낌 2020.09.07

중용가 / 이밀

이 세상 모든 일은 중용이 제일이거니, 믿고 살아왔다네 - 한데 이상도 하지. 이 '중용' -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그려. 자아, 이렇게 되면 무엇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없는 것.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읍내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개울 사이에 농토를 갖네. 반은 선비요, 반은 농사꾼일세.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사람들도 적당히 구슬리네. 집은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으니 가꾼 것이 절반이요, 안 가꾼 것 또한 절반일세. 입은 옷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 장만한 것도 아닐세. 너무 좋은 음식도 먹지 않고 하인배는 바보와 꾀보의 중간내기라. 아내는 너무 똑똑하지도 않고 너무 단순치도 않으니, 그러고 보면 이내 몸은 반..

시읽는기쁨 2020.08.16

다읽(2) - 생활의 발견

젊은 시절에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애쓰던 시기라 주로 철학책이 많았다. 둘은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공유했지만 조금 결이 다르기도 했다. 누가 추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와 함께 읽으며 토론했던 책 중 하나가 이 이다.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이 썼는데 동양인의 정서에 잘 맞았다. 특히 친구는 임어당이 강조하는 동양의 멋과 여유에 홀딱 빠졌다. 반면에 나는 임어당의 노회하고 현실주의적 사고에 거리감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의 생각 차이가 지금 우리 둘의 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임어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즐거움의 추구에 둔다. 인생에서 관념적인 목적이나 목표를 구하는 것은 헛되며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그분의 명쾌한 말이 있다. "만일 인생에..

읽고본느낌 2020.08.15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냐

김성탄(金聖嘆, 1608~1661)은 중국 명말 청초에 살았던 문예평론가였다. 재주가 뛰어났고 활달한 성격에 전통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는 태도 때문에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어겼다 해서 사형을 받았다. 그는 머리가 잘리기 전 이렇게 큰소리 쳤다고 한다. "머리가 잘리는 것은 아플 뿐이고, 가산을 몰수 당하는 것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나 성탄이 뜻하지 않은 일로 그리된 것은 참으로 괴이하도다." 김성탄을 처음 안 것은 오래 전 임어당의 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임어당은 김성탄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에는 김성탄의 글 한 편이 나온다. '행복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인데 절에 갔다가 장마로 열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인생에서 유쾌한 순간..

참살이의꿈 2020.08.07

막걸리 한 병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

참살이의꿈 2020.06.15

불만 많은 나라

이달 초에 OECD에서 '2020년 삶의 질 보고서(How's Life in 2020)'를 발표했다. 소득과 부, 주택, 일과 직업, 삶의 균형, 건강, 지식과 기술, 환경, 주관적 만족도, 안전, 사회적 관계, 시민 참여 등 11개 분야를 조사해서 각국의 삶의 질을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보다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반면에 소득 격차나 불평등 문제는 개선이 되지 않았다. 또한, 서로 간에 관계의 단절이 심해졌다.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과 대화하는 데 쓰는 시간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국가별로는 북유럽과 뉴질랜드, 스위스 국민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주관적 삶의 만족도에서 10점 만점에 6.1점으로 33개국 중 32위를 기록했다. 올해부터 ..

참살이의꿈 2020.03.25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행복이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까지 말한다. 인생의 제일 목표가 행복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행복을 좇는 일이 오히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삶에는 행복 말고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이 책 는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삶의 의미를 더 강조한다. 지은이인 스미스(E. E. Smith) 박사는 긍정심리학자로 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한다. 의미야말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행복한 삶과 의미 있는 삶은 같지 않다. 행복에는 의미 없는 행복도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데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어야 깊이 있고 충만..

읽고본느낌 2020.03.07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여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첫 연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에 대해 자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석과 자야가 오순도순 살던 청진동 시절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자야는 백석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샀다.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시읽는기쁨 2020.02.09

다가오는 말들

은유 작가의 산문집으로 작가의 색깔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글의 소재는 가족, 글쓰기 모임의 학인, 인터뷰를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눈 사연 중심으로 되어 있다. 글에는 세상과 인간을 보는 작가의 섬세하고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은유 작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그분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15년쯤 전일 것이다.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그때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부로서 아이를 키우며 느낀 감상을 진솔하게 써서 많은 공감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서태지 음악에 대한 얘기도 많았다. 그 뒤로 작가의 책은 나오는 대로 찾아 읽어 보았다. 영민하면서 문재(文才)랄까, 재기가 반짝이는 글이 좋았다. 역시 몇 줄만 읽어봐도 은유 작가의 글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반면에 약간은 ..

읽고본느낌 2019.12.10

해피 엔드

'다가오는 것들'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강렬하게 남아 올레TV에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았다. '해피 엔드'는 올여름에 개봉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자막을 보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것 같다. 만든 이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다. '해피 엔드'는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프랑스 상류층의 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속은 병들어 있다. 밝은 화면과는 대조적이다. 이 영화에서 위페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나온다.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보여준 자립적이고 지적인 여성 이미지가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 영화에서는 위페르의 연기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물질의 ..

읽고본느낌 2019.09.19

불행해지는 법

행복해지는 법은 어려울지 몰라도 불행해지는 법은 쉽고 단순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 불행해지려면 남과 비교하면 된다. 사람은 늘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며 산다. 비교는 성취욕을 북돋는 긍정적인 작용도 하지만 대개는 시기심과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심하면 자기 학대에까지 이른다. 불행의 시작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잘 생기고,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운이 좋은 사람은 주위에 수두룩하다. 사람들은 아래를 보기보다는 위를 쳐다보며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열패감으로 연결된다.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위험한 신호다. 나보다 못난 사람 역시 많다. 내가 얼마나 혜택받는 조건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해 주는 바로미터다. 그러나 남의 불행이 ..

참살이의꿈 2019.09.10

99의 노예

단톡방에 친구가 '99의 노예'라는 글을 올렸다. 최근에 어느 집안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오른다. 토지 보상금 문제로 한바탕 분란을 겪은 집이다. 갑자기 생긴 돈 앞에서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돈은 필요 없어. 건강이 최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나, 절에 다니면서 무욕을 강조하던 사람이나, 눈먼 돈 앞에서는 다 똑같아졌다고 한다. 누굴 비난할 처지가 아니다. 나도 같은 부류다. 글에서 가난한 요리사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행복해요!" 그러나 막상 금화를 보자 가면이 벗겨진다. 우리의 신념, 신앙, 지조 등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가련한 자기 위안거리밖에 안 된다. 단지 아닌 척할 뿐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묘하지 않은가. 예수나 부처는 가정과..

참살이의꿈 2019.07.31

이럴 수도 있지

낯선 외국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가진 재산 다 털어먹고 빚까지 졌어. 희망이 없었어. 가족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뒷정리를 했어. 살아갈 일이 막막하더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스페인 북부로 정처 없이 떠났어. 사람이 적고 쓸쓸한 풍경을 택한 거지. 며칠 동안 바닷가를 배회하니 가진 돈도 다 떨어졌어. 절벽 위에도 서 봤지만 도저히 뛰어내릴 용기는 없더군.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바닷가에 있는 허름한 집 대문을 노크했어. 노부부 두 분이 사는데 따뜻이 맞아주더군. 내 행색이 그랬나 봐.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그 집에서 한 달을 함께 지냈어. 그분들도 자식처럼 대해줬어. 저녁을 먹고 나면 두 분은 소파에서 손을 맞잡고 TV를 보는 거야. 작은 화면에 금방 고장이라도..

참살이의꿈 2019.07.15

행복을 위해 버려야 할 것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버려야 행복해지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미국의 재무설계사인 폴란이란 분이 말하는, 버려야 축복인 여덟 가지가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나이 걱정 - 사람은 태어나 나이가 들어가며 어느 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버는 돈이 늘어나고 지위가 높아진다. 그러나 언젠가는 기력이 쇠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며 직장에서 나갈 날을 세게 된다. 젊은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거나 젊은 시절의 나와 비교하다 보면 나이가 걱정이다. 인생은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과정이다. 힘들게 올랐으니 이제 여유를 갖고 기쁜 마음으로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뿐 우위를 따질 수는 없다. 걱정 대신 나이 드..

참살이의꿈 2019.06.11

행복을 생각한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유전자는 한 사람의 외모나 기질을 결정한다. 심지어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장래에 생길 병도 예견할 수 있다. 외국의 유명 배우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해서 미리 유방 절제술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니 행복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낙천적인 사람은 삶의 만족도가 비관적인 사람에 비해 높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유전자가 행복에 관계되는지 밝히는 것은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행복하게 사는 능력도 상당 부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할 수는 없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 연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외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은 순전히 주관적인 감정이므로 변수가 많다...

참살이의꿈 2019.05.27

인생 후르츠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얼마 전에 타계한 키키 키린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인생 후루츠'는 90세의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히데코 할머니가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쁘고 맛있게 열매가 영글듯 두 분 노년의 삶이 아름답다. 마냥 부럽기만 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다. 젊었을 때는 국가의 신도시 프로젝트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앞세우는 신도시 개발이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하는 슈이치와는 마찰을 일으킨다. 히데코 할머니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에 할아버지와 철학이 맞는다. 두 분은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그들만의 자연주의 삶을 실천한다. 꽤 ..

읽고본느낌 2019.04.17

어떻게든 되겠지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다. 금은보화를 쌓아두고 비단 이불을 덮고 잔들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두막집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만 못하다. 건강이 최고라는 것은 건강해야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는 것도 가난의 걱정을 막기 위해서다. 다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그러나 지나침은 오히려 독이 된다. 건강이나 돈의 노예가 되면 주객이 전도된 격으로 아무 소용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보면 걱정거리 중 상당 부분이 돈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돈 때문에 형제간에 마찰이 생기고 이웃과 사이가 멀어진다. 소리(小利)를 취하느라 대의(大義)를 버린다. 타인을 어지럽히면 본인도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

참살이의꿈 2018.11.06

가난한 꽃 / 서지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 가난한 꽃 / 서지월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더 바랄 것이 없으니 자족의 기쁨이다. 누가 봐주든 말든 상관 없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 말한 예수의 뜻도 비슷하지 않을까. 인간 세상에서는 욕망의 꽃밭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뭇 사..

시읽는기쁨 2018.09.23

작은 걸음

지난 7, 8월 두 달은 거의 걷기를 하지 못했다. 날씨 핑계를 댔지만 실은 게으르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걷지 않으니 몸은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기는 더욱 힘들었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됐다. 8월 중순부터는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9월 들어서는 일부러 바깥 걸음을 하고 있다. 집 주위일지라도 하루에 한 번은 나가려 한다. 뒷산이나 경안천변, 또는 학교 운동장이 주로 찾는 장소다. 한두 시간으로 족한 작은 걸음이다. 아직 햇볕은 따갑지만 바람은 선선해졌다. 걷기는 보약이다. 이제 살겠다고, 몸이 고마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냐, 내가 미안했어. 그동안 몸이 약해졌는지 짧은 걸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른해진다. 기분 좋은 피곤함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진속일상 2018.09.10

고통의 의미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인간을 뺀 다른 동물은 생존과 번식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반면에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더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동물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었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다. 일상사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생존과 번식 본능과 관련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의미만 발견하면 생존과 번식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독신으로 수도 생활에 몰두하는 종교인이 그 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다.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는 그만큼 소중하다. 동물의 생존 전선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통..

참살이의꿈 2018.09.08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비범함이란 평범한 일..

시읽는기쁨 2018.08.30

체력과 열정

"체력과 열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살짝 미쳐야 하고, 득실을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을 한 조유성 할머니는 여든셋인데 동남아의 밀림을 찾아다니며 곤충 사진을 찍고 있다. 벌써 9년째다. 사진을 배우고 나서 야생화와 곤충의 세계에 빠졌고, 2천년대 후반부터는 열대지방 동식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밀림 안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인도네시아 프로볼링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 할머니가 멋있다고 여기면서 나는 왜 안 될까를 생각한다. 이것저것 재고 있기 때문이지만, 실은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짝 미치는 게 두려운 이유도 있다. 부러운 것과 실천은 별개다. 나이가 들면 체력과 열정이 시드는 게 당연하다. 일부는 젊은..

참살이의꿈 2018.08.13

행복은 내 선택이었다

호주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분이 죽음을 앞둔 노인들과 대화를 나눈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고 한다. 그분이 제일 많이 들은 다섯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다. 1.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 2. 그렇게 열심히 일 할 필요가 없었다. 3.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조사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람 살아가는 껍데기는 달라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눈을 감기 전 생을 돌아보며 이 정도 아쉬움은 누구나 가지리라 본다. 알면서도 실천 못 하는 것,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탓이다. 우리는 생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남의 눈..

참살이의꿈 2018.08.05

나는 행복합니다

내 산 게 억울하다. 왜 그리 미련하게 일만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래 살았어도 자식한테 효도 받지도 못한다. 요새 젊은 사람들 재미나게 사는 것 보면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고향에 내려갔을 때 하신 어머니의 직설적인 말이다. 이런 내색을 안 하셨기 때문에 적잖이 놀랐다. 작년에 동생이 낙향해서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고 있으니 지내시는 환경은 좋아졌다. 어머니는 동생이 내려간 뒤로 평생을 하시던 농사일을 그만두셨다. 밭에 나가는 대신 마을회관에서 종일 노신다. 예전 같이 식사 준비도 걱정 안 하시고, 혼자서 드시는 일도 없다. 그런데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씀을 하신다. 어머니는 여장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억척스레 농사일을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모든 것이 당신의 책임이었고 몫..

참살이의꿈 2018.07.04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진 글을 쓴다는 것은 칭송받을 만하다. 서너 문장만 읽어도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자기 '류(類)'를 가진 것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는 김훈이 있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마취에 걸린 듯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몸이 땅에서 몇 cm쯤 떠오르는 것 같다. 센티멘탈하면서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독특하면 호오의 구별이 갈린다. 나는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몇 년 전에 도 힘들게 읽었다. 는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다. 글이 쓰인지는 30년도 더 되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 책은 삽화가 반은 차지해서 그나마 수월하게 넘어간다. 이 책에는 '소확행'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나온다. 요즈음 이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하루키에게서 유..

읽고본느낌 2018.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