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막걸리 한 병

샌. 2020. 6. 15. 11:28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만 누구보다 고분고분하고 내 말을 잘 들어준다. 그렇다고 파트너가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주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레이저 광선을 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춘다. 그래, 내가 너무 과격한 거지. , 술이나 한잔 하자구, 건배! 대략 이렇게 된다.

 

기분이 좋아지는 데는 막걸리 한 병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배가 불러서 못 마시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 비하면 주량이 많이 줄었다. 막걸리 한 병이면 딱 석 잔이 나온다. 이걸 조금씩 홀짝이며 마신다. 어릴 적에 어른들을 보면 큰 대접에 담긴 막걸리를 한숨에 주저 없이 마셨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막걸리 넘어가는 소리가 폭포수 같았다. 그런 건강과 호기의 때는 지나갔다.

 

가끔은 속 터놓으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싶다. 지금은 나는 혼자다. 누굴 탓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이다. 그러나 이만큼 나이가 들고나서 나는 확신한다. 중요한 것은 친구가 아니라 내가 더욱 단단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위안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을 일이다.

 

어찌 됐든 막걸리 한 병으로 세상이 환해진다. 쪽방 같은 마음이 백 평 저택으로 넓어진다. 속상한 일이 생각나도, 허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며 너그러워진다. 생의 종착역에 갔을 때도 술 한 잔이면 내 초라한 인생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술을 마실 때는 나만의 버릇이 있다. 옆에 볼펜과 메모지를 놓아두는 것이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두뇌의 잠자고 있던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 같다. 평상시에 떠오르지 않는 생각이 불쑥 나타나고 온갖 상상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그러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기록해 둔다. 맨정신으로 돌아와서 적어놓은 글을 보면 십중팔구는 헛소리지만, 그래도 놀이처럼 재미있는 걸 어쩌랴.

 

어제 적은 글을 보니 '죽을 때까지 갖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책을 볼 수 있는 두 눈(한두 시간 정도는 거뜬히), 도움 없이 다닐 수 있는 두 발(늙어서도 동네 한 바퀴 정도는), 그리고 고독을 달래줄 술(적당히 취할 정도까지는)이 그것이다. 아마 이런 상상을 하며 흐뭇했을 것이다. 동네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는 와인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읽는다. 마당 한 켠 나무 그늘 아래라면 더 좋겠지. 이것이 내가 그리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도 되겠다.

 

적당한 술은 자족(自足)의 기쁨을 준다. 술 한두 잔으로 나의 고독은 찬란하게 빛나고, ‘고립적 일상이 주는 행복에 젖는다. “친구는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릴 것. 사교에 시간을 빼앗길수록 당신의 지성은 무뎌진다.” 그대가 준 이 말을 명심한다. 너무 분주하게 살지 말라고 코로나19가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은가.

 

 

낮술 한 잔을 걸치고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살랑거리며 희롱한다. 아무도 날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이럴 때 나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은퇴한 노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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