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시인의 마을

샌. 2020. 5. 19. 10:40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는 세 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넓은 평원의 단조로운 풍경이 질리도록 펼쳐졌다. 다들 눈을 감은 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를 운전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레이어에 꽂았다. 정겨운 우리 가요의 멜로디가 독일 버스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독일에 연수를 온 지 두 주일째, 뒤에서 소곤거리며 잡담이 들리던 버스 안이 숙연해졌다.

 

몇 곡의 트로트가 지나가고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이 나왔을 때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노래 분위기와 당시 상황이 어쩜 그리 절묘하게 맞았는지 모르겠다. 어울리지 않게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주리오

누가 내 마음의 위안 돼주리오

어린 시인의 벗 돼주리오"

 

겉보기와 다르게 내면에서는 무척 외로움을 탔었는가 보다. 이국의 낯선 풍경이 그런 느낌을 더해주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낭만의 사치를 억지로 끄집어내려 했는지도. 지금도 '시인의 마을'을 들을 때면 26년 전 독일을 달리던 버스 안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은, 미소 속에서 가끔 한숨을 쉬는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보인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라 경제도 호황을 누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했다. 1993년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뒀다고 자랑했다. 외국에서는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다고 경고했지만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교사들의 견문을 넓혀주려는 목적으로 해외 연수를 실시했다. 한 달간 독일 전역의 대학교와 연구소를 방문하고 강의를 듣는 기회가 나한테도 찾아왔다.

 

서울에 30평 아파트를 장만한 것도 그때였다. 그것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강 남쪽에 당첨되었다. 10평대에 살다가 30평으로 이사 가니 집이 대궐이었다. 어엿한 중산층으로 진입했다는 기분에 들떴다. 직장인 S공고에서 선생 노릇하기도 편했다. 2학기가 되면 학생들이 실습을 나가 수업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업이 한 시간도 없는 요일도 있었다. 교수보다 더 낫다고 희희낙락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별 고민 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던 시기였다.

 

사무실 동료들과도 화합이 잘 돼 재미있게 지냈다. 그때만 해도 자유로울 때라 수업이 없는 사람끼리는 탁구나 테니스를 치고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2천 년대에 들어서서야 근무시간 중에 하는 오락은 금지됐다. 휴일에는 팀을 만들어 등산을 다녔다. 본격적으로 야생화나 시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그때다. 지금 내 블로그의 뼈대를 이루는 내용은 대부분 그 화려했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운이 좋을 때는 뭐든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법이다. 그 예가 앞에서 말한 대로 전국에서 20명을 선발하는 교사 해외 연수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1994년에 있었던 1차 모집이었다. 영어 듣기 테스트도 있었는데 외국인만 보면 벙어리가 되는 내가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불가사의다. 뒤셀도르프를 시작으로 독일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며 한 달간 귀중한 경험을 했다. 독일의 중요 도시와 대학, 과학 전시관이나 박물관은 거의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주말이면 끼리끼리 어울려 이웃 나라로 여행을 갔다. 첫 해외 나들이로는 굉장히 풍성했다.

 

단 하나 애로사항은 살림이 쪼들렸다는 점이다. 외벌이 선생 월급으로는 아이 둘을 가르치며 생활하기 힘들었다. 아파트 대출금 납부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전세금 차이만큼 활용해서 살림에 보태려는 의도였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이었다. 성남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다시 서울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현재도 무난했지만, 미래는 핑크빛이었다.

 

대한민국은 얼마 가지 않아 IMF 환란을 겪었고, 내 전성기도 그즈음에 끝나가고 있었다. 40대 후반부터는 내리막길이었다. 존재에 대한 20대의 고뇌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만만했지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바탕 회오리가 불고 난 여파는 예상외로 컸다. 후유증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시인의 마을'은 그 시절의 여운이 남아 있는 노래다. 한창 팔팔했을 때지만 반대쪽으로 향하고픈 갈망이 있었다. 세상살이는 정과 반,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상호작용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요사이 듣는 '시인의 마을'은 느낌이 다르다. 이젠 누가 손수건 한 장 건네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낭만 타령은 지나온 구릉 뒤에 숨었다. 대신 내 앞에는 하늘에 번지는 고운 저녁노을이 보인다. 눈을 들고 내 지친 발걸음을 쉴 곳은 어디에 있을까를 묻는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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