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선생의 소품 글을 보다가 만난 구절이다. <선귤당농소>에 실린 원문은 이렇다.
眉宇間 隱然帶出澹沱水平遠山氣色 方可與語雅致 而胷中無錢癖
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 주변에서 과연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선비 정신이 살아 있던 옛날에는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각자의 욕망 충족을 위해 허기지듯 내달리는 현대 자본주의 인간 군상들에게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혹 있지만 내가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일 테니까.
선생은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에서 벗어난 사람의 얼굴을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띠고 있다고 했다. 청정하고 은은하다는 뜻이리라. 사람의 됨됨이는 얼굴에 드러난다. 얼굴에서 풍기는 느낌은 감추거나 속일 수 없다. 그중에서도 노욕으로 가득한 늙은이의 얼굴은 봐주기 힘들다.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책이다. 이덕무 선생도 분명 그런 사람일 것이다. 얼핏 소로우, 니어링, 산세이, 루에스 등의 이름도 떠오른다. 대체로 자연주의자들이다. 이덕무 선생의 글을 해설한 한정주 선생은 젊은 시절 책에서 만난 분들을 이렇게 꼽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속의 한스 숄과 조피 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속의 청년 카를 마르크스
<레닌의 추억> 속의 블라디미르 레닌
<옥중수고> 속의 안토니오 그람시
<동지를 위하여> 속의 네스토 파즈
<아리랑> 속의 김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속의 신동엽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속의 김수영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속의 전태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속의 윤상원
<나의 칼 나의 피> 속의 김남주
모두가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는데 생애를 바친 분들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영달을 탐하지 않았다.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군자가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한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속기(俗氣)가 가득하다. 이생에서는 틀려버렸다. 자신의 길을 꼿꼿이 걸어갔던 옛사람을 생각한다. 하늘에 뜬 별만큼 아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