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대하는 글 두 편을 옮긴다. 첫 번째는 지난달 한겨레신문에 실린 김종철 선생의 칼럼이다. 제목이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이다.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 / 김종철
인류가 소위 문명생활을 시작한 이래, 역병은 인간 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세계의 역사는 어떤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때로는 국지적으로, 때로는 대륙 전체에 걸친 역병의 창궐과 그 후유증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력의 발전이나 계급투쟁 혹은 전쟁이 아니라, 감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표적인 예는 중세 말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일 것이다. 당시 중국 쪽에서 시작된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 확산함으로써 유럽 인구의 태반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대규모 인명 소실로 유럽 중세 질서가 결정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큰 피해를 입은 농노와 하층민의 인구가 대폭 줄어들자 중세 질서의 하부구조, 즉 농노제의 지속적인 유지는 크나큰 난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불같은 열정으로 신대륙을 탐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꽉 막힌 폐색 상황을 타개하려는 유럽인들의 필사적인 기도에서 비롯된 기획들이었다.
역병의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는 고대 아테네의 비극적 재난이다.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를 상대로 벌인 펠로폰네소스전쟁 2년째, 아테네는 돌연히 전염병의 창궐에 휩싸였고, 그 때문에 결국 전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정체불명의 괴질 앞에서는 건강한 젊은 병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영웅적인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그 아들들도 괴질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쟁 중에 지도자를 잃고, 대규모의 병력을 잃은 아테네 군대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단지 대규모의 병력 손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괴질이 창궐하여 가족, 친지, 수많은 동료 시민들이 느닷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자 그들은 자기절제의 기율을 팽개쳐버리고, 법을 우습게 여기고, 더 이상 신을 섬기지도 않고, 찰나적인 향락에 빠져버리기 시작했다고, 당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테네인들 사이의 이러한 풍속의 변화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튼튼한 민주주의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절제라는 미덕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이는 그리스 출신의 20세기 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였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려는 자세야말로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성립 요건이라는 그의 통찰은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의 성과였다. 그런데 바로 자기절제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무너짐으로써 아테네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쇠락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 끝에 마침내 마케도니아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을 받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 전체가 '환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아직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탓에 오직 '사회적 거리두기'만이 그나마 유용한 대응책일 수밖에 없으므로, 기존의 익숙한 사회생활이 거의 전면적으로 작동 정지 상태가 되었다. 이에 따른 개인적 사회적 피해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코로나 사태는 인간의 역사에서 전혀 낯선 종류의 경험이 아니다. 고대, 중세의 역병과 다른 게 있다면 감염 속도가 대단히 빠르고, 그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자본주의의 폭주, 과잉 산업 발전과 소비주의의 소산이다. 오로지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무절제한 탐욕의 정신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바람에 야생생물들의 서식지를 포함한 생태계는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고, 거기에 자본, 물자, 사람의 대량 이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 논리까지 합세하여 지금과 같은 파국적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역병의 창궐이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의 본질과 성격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고대하며, 백신이나 치료제의 조기 개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래의 생활이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었는지 우리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 뉴스에 의하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는 둔화되자,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모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이는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가 아닌가. 그렇다면 길은 하나, 더 이상 생태계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인간다운 생존과 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우리들 대다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신화,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한 끊임없는 성장(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관념과 깨끗이 결별하는 게 진짜 급선무인 것이다.
온갖 징조로 봐서, 앞으로 코로나바이러스와 유사한 역병은 빈발할 것이 틀림없다(존스홉킨스대학의 보건연구팀에 의하면, 오늘날 신종 바이러스는 연간 200종이 넘게 출현하고, 그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팬데믹'을 유발할 수 있는 바이러스들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백신과 치료제를 찾으날고 허둥댈 것인가.
물론 당장은 기술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 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아니고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또, 장지적인 고립 생활이 면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두 번째는 이번 호 <녹색평론>에 실린 우석균 선생의 글이다. 제목이 '코로나19, 환경위기, 자본주의'다.
코로나19, 환경위기, 자본주의 / 우석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코로나19(COVID19)라는 병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라는 질문, 몇 개월이면 끝날까? 아니면 1년이면 끝날까? 아니면 그보다도 더 갈까?
대답은 조금 시시할 정도로 뻔하다. 그 대답은 '인구 집단이 집단면역을 가질 때까지'이다. '집단면역'이라고 하면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준비를 하라'는 역사에 남을 망언을 하면서 이제는 다들 꺼리는 악명 높은 어구가 됐지만 사실은 감염병을 다룰 때 흔히 쓰이는 말이다. 다만 한 사회가 집단면역을 획득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는 보리스 존슨이 말했던 길, 즉 질병에 걸려 집단면역을 가지게 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백신으로 사람들이 집단면역을 획득하는 길이 있다.
첫 번째 길, 즉 사람들이 역병에 감염되어 집단면역을 획득하는 길은 코로나19의 경우 이론상으로는 인구의 약 60%가 감염되어 면역이 생기면 집단면역 문턱치(역치)에 도달한다. 그러고 나서야 감염이 서서히 줄어든다. 그런데 이 길은 코로나19의 사망률을 최소 2~3%로 잡더라도 우리나라 인구로 따지면 인구의 60%, 즉 3,000만 명이 코로나19에 걸려야 하고, 그중 2~3%인 최소 60~90만 명이 사망하는 길이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따라서 두 번째 길이 남는다. 그 길은 백신으로 사람들이 면역을 획득하는 길이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의 경우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금 50대 중반의 연령대만 해도 학교 다닐 때 60명 한 반에 한 명꼴로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인이 있었다. 지금 형태의 소아마지 백신이 나온 것은 1961년이었다. 홍역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백신으로 별 문제가 안되는 병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주요 사망원인 중의 하나다. 백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신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백신으로 집단면역을 획득하는 길이 바로 두 번째 길이고, 이 길이 우리가 선택할 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중략)
백신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서 감염의 확산을 억제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방법으로는 치료약제이다. 예를 들어 신종플루 시기에는 타미플루와 같은 약이 있었다. 이러한 잘 듣고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이 약으로 백신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신종플루를 극복한 길이었다. 신종플루는 다행히도 치명률이 1,000명이 병에 걸리면 1명 이하가 사망하는 정도의 위험성 정도밖에 안되었고, 또 다행히 예방접종이 9개월만에 나오면서 쉽게 넘어간 셈이지만 문제는 코로나바이러스엔 알려진 치료제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감염의 확산을 억제하는 방법은 이른바 '확진자 추적'과 밀접 접촉자 자가격리로 잘 알려진 역학적 방법의 '봉쇄와 완화', 즉 사회역학적 환자 억제 방법이다. 감염자와 감염 의심자의 추적, 격리 그리고 조기 진단과 조기 치료를 말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감염병과의 속도경쟁인데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감염병이 빠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 번째로 나오는 것이 전통적 방역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 또는 물리적 거리두기, 손씻기, 마스크 등이다. 여기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소한 1m, 외국에서는 2m를 이야기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기본적으로 비말(침방울, 콧물 등) 감염이고 접촉감염이므로 서로 팔을 뻗어 닿지 않는 거리로 떨어져야 안전하다는 것이다.
(중략)
여기까지 오면 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즉 코로나19는 언제까지 갈까라는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답은 백신이 나올 때까지이다. 그럼 언제 백신이 나올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개월 운운하자 미국의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 알레르기 감염병연구소 소장 앤서니 파우치가 최소 1년 내지 18개월이라고 이야기한 사실은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수석과학자문 패트릭 발란스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막상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1년 내지 1년 반조차도 '천운이 따르면'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RNA 바이러스는 변이가 많다. 예를 들어 "에이즈는 30년간 개발했지만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고, C형간염 역시 백신이 없다." "인플루엔자는 1940년대 첫 백신 등장 이후 가장 최근 업데이트된 백신 개발까지 무려 70년 걸렸다. 개발은 됐지만 매년 백신을 맞아야 하고 예방 효과가 제일 높아 봤자 70% 수준"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백신이 나올 때까지 천운이 따라야 1년 내지 1년 반이고 몇 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몇 년 아니 그 이상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세계가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After Corona)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더이상 재담이 아니다.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시대는 이제 '코로나 시대'다.
(중략)
2008년 경제위기를 정확히 예측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학교 교수는 "대공황보다 훨씬 더 나쁘다. 경기 침체는 V자도, U자도, L자도 아닌 I자로 올 것이다"라고 '야후파이낸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미 '1930년 이후 유례 없는 경제위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미 경제위기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벗어날지 알 수도 없다.
이러한 경제위기 시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무슨 일을 강요할지를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만 해도 1997년의 경제위기, 2008년의 경제위기의 경험을 통해 자본가계급이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벌써부터 타격을 입은 항공업, 호텔업계에서는 정리해고가 진행되고 있다. 서민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직격탄을 맞아 생계가 걱정인데 정부는 기업에는 100조 원을 푼 반면 서민들의 생계 지원에는 5조 원을 쓰느니 마느니 하고 있다.
다른 한편 기후위기는 이제 8년 정도만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지점을 통과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류는 1930년대 이래 전례 없는 경제위기와 인류 생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인류 자체의 존망이 걸린 기후위기도 맞닥뜨리고 있다.
코로나19가 왜 발생했는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 인류는 전례 없는 전세계적 신종 감염병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미 사스, 신종플루, 지카, 에볼라 등 떠오르는 것만 세어도 몇년 만에 한번씩 전세계적 감염병을 겪고 있다. 이 역병들은 자본주의적 농축산업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토지 이용이 환경을 파괴하여 인류가 이전에 접하지 못하던, 자연에 남아 있어야 할 동물들의 바이러스를 직접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역병들이다. 예를 들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가 가지고 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천산갑 등의 포유류를 매개로 인간에게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종플루 바이러스나 조류독감 바이러스처럼 이렇게 새로운 바이러스는 멕시코의 축산농장과 같은 자본주의적 공장식 축산업에 의해 마련된 최적의 배지를 통해 인간에게 전파될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모하고 증식된다. 그리고 이는 전례 없는 세계화로 인해 빠른 속도로 전세계적으로 전파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불평등을 악화시킨 지 40년째다. 이 예가 유럽의 공공의료체계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민영화되고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재정 부족으로 고통을 받은 지 오래다. 유럽이 이 정도인데 미국은 더 말할 것도 없으며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의 제3세계는 신종 감염병의 의료적 대비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인도의 예가 그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코로나19로 인한 인류의 보건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하는 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그 과정은 생산 현장인 공장과 유통, 대중교통에서부터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로 인해 생길 사회적 부담은 노동자와 서민들이 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사회적으로 정의롭게 부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여러 나라의 경우 코로나 기간 동안 해고를 금지하거나 해고되었을 경우 국가가 실업급여로 90%까지 급여를 지급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노숙자를 주차장 같은 곳에 금을 긋고 수용하지만, 반면 프랑스는 정부가 호텔과 계약을 해서 노숙자를 재운다. 스페인의 경우 의료시설이 부족하자 민간병원을 국유화했다. '샤넬'이 향수 대신 손세정제를 만들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자동차회사나 '록히드마틴'이 인공호흡기를 만든다. 자동차회사들이 탱크를 만들고 비행기회사들이 전투기를 만들던 2차대전 시기의 전시경제 '뉴딜'이 지금 코로나 시기에 형태를 바꾸어 다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코로나 뉴딜'이다.
일단 우리가 시작할 일은 이 경제위기 시기의 경제적 부담을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넘기지 않고 불평등을 역전시키는 '코로나 뉴딜'이다. 예를 들어 당장 할 일은 기업의 해고 금지이다. 그리고 결국 문을 닫는 기업이 생기면 국유화를 통해 국가가 나서서 고용 유지를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자본주의하에서의 '공간이 곧 이윤'이 되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 즉 토지와 공간의 이용을 공공화하는 일이다. 당장 임대료를 못 내도 퇴거를 중기시켜야 한다. 공자의 사람 사이의 거리를 1m 이상 유지시켜야 한다. 대중교통을 대폭 확대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공간을 확보해주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돌봄노동자들을 대폭 확대 고용해야 한다. 이러한 공간의 사회적 이용이 '코로나 뉴딜'의 핵심 중 하나이다. 또한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에게는 재난수당 등의 생활비가 지급되어야 한다.
보건 의료 부문에서도 앞서 이야기했듯이 공공의료가 대폭 확충되고 필수적이지 않은 의료기관은 공공화해야 하며 필수적인 인공호흡기나 의료장비. 마스크 등의 생산과 유통은 정부가 관리해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코로나 뉴딜'의 기본적인 얼개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코로나 뉴딜'의 출발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 '코로나 뉴딜'은 '녹색 뉴딜'의 첫 번째 단계여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1930년의 위기에서 2차대전으로 이어진 야만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이 야만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 세기 전에 던진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야만인가, 자본주의의 극복인가? 인류의 생존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