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어디나 천국이 될 수 있다. 팔여거사의 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선물이다. 다만 그것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을 뿐이다.
팔여거사에게 부자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대는 살림살이가 나보다 백 배나 넉넉한데 어째서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기야 하지.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라네. 이 열 가지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데 이외에 필요한 게 뭐가 있겠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내 옆을 둘러봐도 고작 늙은 부부가 사는 집에 무슨 살림살이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세 개나 되는 냉장고에는 먹을거리가 가득 차 있다. 클릭 몇 번 하면 그날로 물건이 배달된다. 너무 쉽게 사니 너무 낭비가 크다. 아무래도 큰 죄를 짓고 사는 것 같다.
그런 문제로 어제는 아내와 작은 다툼을 했다. 아내는 사려고 하고, 나는 말린다. 이젠 버리고 비우면서 간결하게 살고 싶다. 많은 것을 쌓아두고 있지만 정작 나에게 필요한 한 개는 무엇일까. 지금은 혼자서 내 목록을 만들지만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우리의 목록을 만들어 볼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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