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라고 말하며 나를 깨우치겠다고 새해의 마음 다짐을 했다. 보름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다. 죽는다는 -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 의식이 내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한다. 좀 더 초연해진다 할까, 세상사의 헛됨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때는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날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죽음에서 예외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다가 돌연 인생의 끝이 닥쳤을 때 흔연히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을 열심히 산 결과는 생의 애착이나 후회로 괴로워할 가능성이 크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대하는 마음의 건강성이 다를 것이다.
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살았으면 살 만큼 살았다. 지금 간다 한들 아쉬울 게 별로 없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의 과정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가야 할 때 쉽게 가지 못하고 남의 손에 의지해 생명만 유지할까 봐 겁이 난다. 얼마 전에 지인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는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시더니 방에 가서 누워계셨다. 조용해서 들어가 봤더니 이미 운명하셨더라는 전언이었다. 아흔이 넘으셨는데 그동안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내셨단다. 뭐니 뭐니 해도 죽음복이 제일인 것 같다.
암도 마찬가지다. 암 자체보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이 두려운 게 사실이다. 방사선이나 화학요법이 동원된 항암치료는 환자의 몸을 망가뜨린다. 젊은 나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에 그럴 용기는 없다. 암이 찾아왔다는 것은 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아닐까. 그걸 받아들이면 암을 대하는 태도도 훨씬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현대 의학에 의지하기 전에 죽음을 대하는 본인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을 때 죽음 연습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훈 작가의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 보면 월나라 노인들은 공동체에 부담이 되는 나이가 되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평민이든 왕이든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이를 '밝은 죽음'을 뜻하는 돈몰(旽沒)이라 부른다. 일종의 안락사다. 이 이야기를 보면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사회의 문화, 관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 의료 산업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닌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느냐로 의학이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 없이 이 세상에 나왔듯 죽음도 불가항력으로 닥쳐올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맞는 자세는 어느 정도 나에게 달렸다. 그에 따라 품위 있는 죽음이 있고, 추한 죽음이 있다. 밝은 죽음과 어두운 죽음이 있다. 자신이 갈 때가 되었음을 아는 것이 큰 지혜가 아닐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