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갈증에 시달린다. 그리스의 쾌락학파가 삶의 즐거움을 추구했지만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은 정신의 쾌락이었다. 재미에도 여러 차원이 있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다. 재미에 의미가 더해지지 않으면 인간은 껄떡댈 수밖에 없다. 재미는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의미는 공익이나 자아 발전의 가치를 담고 있다. 어릴 때 읽었던 무협소설은 엄청 재미있었다. 재미로만 치면 이보다 더한 오락거리는 없다. 그러나 읽고 난 뒤에 남는 것은 없다. 재미와 의미가 함께 하는 독서라야 인간은 오래 지속하는 정신적인 기쁨을 누린다.
재미와 의미는 공존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재미를 추구하면 의미를 잃고, 의미를 추구하면 재미를 잃는다. 그래서 인간을 재미형 인간과 의미형 인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활동적이지만, 후자는 내향적 삶을 산다. 의미형 인간은 고독을 즐기고, 독서나 요리, 산책 등 차분한 움직임에서 재미를 찾는다.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편향은 위험하다. 너무 의미만 좇으면 허황된 관념에 떨어지기 쉽다. 반대의 경우는 경박하고 바쁘기만 하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춤과 혁명을 하나로 엮지 못하면 정신의 불협화음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재미와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중용이 아닐까. 재미있으면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인생의 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합쳐지고 나중에는 둘의 구분마저 희미해질 때 우리는 삶의 원형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거실에서 아이들은 숨넘어갈 듯 까르르 웃는다. "너희가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아이들의 재미는 찾는 재미가 아니고, 아이들의 의미는 구하는 의미가 아니다. 어른이 된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멀리 떠나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