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드는 밤이 있다. 주로 윗집의 층간소음 탓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은 심란하여 잠이 안 온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거나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낡게 하고 허물어버리는 잔인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고향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요사이 같은 늦가을에는 고향을 찾을 일이 아니다.
빨리 내려와서 가을걷이를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연락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흔 연세에도 온갖 농작물을 기르고 거두신다. 그리고 가을이면 수확해서 자식에게 주는 재미로 사신다. 배추, 무, 사과, 깨, 생강, 시래기, 당근, 파, 호박 등 이번에도 차 뒤의 트렁크 하나 가득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는 않다. 고맙게 받아오고 잘 먹어주는 게 효도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마음에는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얹은 것 같다. 다 모이지 못하는 형제를 보면서 어머니는 오직 안타까워하실까. 또한 언제까지 이런 가을 보따리를 당신의 손으로 직접 싸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 옆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지도 못했다. 마을에서는 외지인 출입을 금지하니까 빨리 가라고 어머니가 먼저 재촉하셨다. 같이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지팡이를 짚고 배웅을 나선 어머니의 허리는 더 굽어졌다.
안부를 묻다 보면 온통 아픈 사람뿐이다. 요양원에 계신 고모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뇌졸증으로 벌써 5년째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이모 역시 집으로 돌아오기는 난망한 상황이다. 이웃집 병섭이 어머니는 다리가 아파 겨우 마당 출입만 할 뿐이다. 젊었을 때 마을에서 제일 예뻤던 수근네 어머니는 당뇨로 자주 응급실에 실려간다. 면 소재지에 살던 명준이 어머니는 치매로 엉망이 된 모양이다. 명준이네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게를 했다. 그때는 석유로 호롱불이나 남폿불을 밝혔는데, 유리 댓병을 들고 가면 명준이 엄마가 나와서 됫박으로 석유를 퍼 줬다. 60년 전이니 그때는 고운 새색시 시절이었으리라. 농사를 짓지 않으니 도회지 사람처럼 얼굴이 하얘서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긴 세월을 격한 명준이 어머니의 두 모습이 잘 연결이 안 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슬퍼진다. 태어난 이상 밟아야 하는 과정임에 우리 누구나 예외가 없을 것이다.
고향 마을은 적막하다. 뛰노는 아이들은 사라졌다. 누구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라는 소식은 끊어진 지 오래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말년에 밖을 내다보며 늘 중얼거리셨다. "사람 사는 마을에 사람이 왜 이리 없노." 내가 있어 봐도 그렇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가끔 차만 지나가는 적막강산이다. 요사이 농부는 들에 나갈 때도 차를 타고 간다고 한다.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골목의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가득했던 내 고향은 어디로 갔는가.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밤에 이조년(李兆年) 선생의 이 시조가 문득 떠오른다. 달 밝은 속에서 배꽃 향기는 분분하고, 하늘에는 은하수가 바다처럼 흐르는 밤에,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선생이 처한 상황은 나와 다르겠지만 시조의 끝줄은 700년 뒤 가을에 아무개의 탄식으로 차용한들 나무라지 않으시리라. 이런저런 사념과 안타까움으로 정신은 점점 말똥해지는데 옛 기억은 자꾸만 나를 일엽추심(一葉秋心)에 빠트린다. 다 잊어버리고 싶으니 어쩌랴. 이화(梨花)나 은한(銀漢)이 없고 자규(子規)와도 먼 나는, 밤 1시에 조심조심 거실로 나가 문갑의 서랍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