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 30

토지(9, 10)

9, 10권은 3부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서희가 간도에서 돌아온 뒤인 1920년대 이야기로 경성, 진주, 하동, 만주 등이 무대다. 신분 질서가 붕괴되며 양반과 상민 사이의 결혼이 나타는 시대다. 서희와 길상의 뒤를 이어 홍이와 허보연이 두 집안의 마찰을 이겨내고 결혼한다. 관수는 백정의 사위가 되어 형평운동을 주도한다. 3.1만세 뒤 민족의 미래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다양한 분파가 생겨난다. 환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이어가는 동학 후예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임정과 공산당 조직이 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모습도 자주 나온다. 이상현처럼 시대의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서의돈 같은 사회주의 그룹이 있고, 민족자본을 육성해서 일본에 대항하려는 일군도 있다. 어쨌든..

읽고본느낌 2025.01.31

사기[36]

주창은 강직한 성격으로 거침없이 바른말을 했기 때문에 소하와 조참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가 그에게 몸을 굽히고 낮췄다. 주창은 일찍이 고조(유방)가 한가롭게 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말씀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고조가 척희(戚姬)를 끌어안고 있어서 주창은 뒤돌아 달아났다. 고조가 뒤쫓아 와 붙잡더니 주창의 목을 타고 올라앉아 물었다."나는 어떤 임금이냐?"주창이 고개를 곧추세우고 말했다."폐하께서는 걸왕과 주왕 같은 임금이십니다."이에 고조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 일로 해서 주창을 더욱 꺼리게 되었다. - 사기(史記) 3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한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고조 유방을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던 승상들에 관한 열전이다. 장창, 주창, 신도가 등 여러 명이 나오지만 그중 대표적인 ..

삶의나침반 2025.01.30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271)는 쾌락학파의 창시자라고 고등학생 때 배웠다. '쾌락'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육체보다 정신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둔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이상적 삶이란 육체적 욕구의 충족보다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우리 정신이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 불렀다. '즐거움' '근심 없음' '평정'으로 해석되는 아타락시아는 물질적 욕망을 줄이고 자연적인 욕구를 충적시킴으로써 달성되는 내면의 평온을 말한다.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이란 내면의 불안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읽고본느낌 2025.01.29

설날 마누라랑 장보기 / 서봉교

시골 가야 된다고 궁시렁대는 마누라를 위해설거지며 빨래 널고 개고청소기 돌린 후이불 깔고 마트 갔는데 그놈의 잔소리는 쉴 줄 모른다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안 보길래살짝 알밤을 한 대 주고는혼자 보라고 나오면서다음 생에 환생해서 당신과 결혼하면벙어리였으면 좋겠다고 했더니차례 지내러 새벽 춘천 가는 길아무 말 없다자냐고 물어도 대답 없고아마 잔뜩 부은가 보다 도착해서 한 마디 당신도 꽤 시끄럽거든그리고 난 환생 같은 거 안해 - 설날 마누라랑 장보기 / 서봉교  내일이 설날이다. 어제부터 눈이 엄청 내리고 있다. 창밖의 소나무 가지는 무거운 눈을 인 채 힘겹게 버티고 있다. 곧 부러질 듯 아슬아슬하다. 올 설은 고향에 안 가기로 했지만, 이런 날씨라면 내려갈래도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 같다. 명절 스트레스니 ..

시읽는기쁨 2025.01.28

한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니까

당구와 바둑, 비슷한 또래가 만나는 두 개의 취미 모임이 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모임에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본다. 대체로 의견은 비슷하다."뭘 하더라도 길어야 10년이겠지." 여든이 넘어서도 계속 모임에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당구장이나 기원에서 봐도 80이 넘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패키지여행을 가더라도 이미 내 나이는 최고령자다. 건강하더라도 대외 활동의 분기점이 대략 여든 전후라고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억지로 나간다 한들 타인에게 신경을 쓰게 만들고 폐를 끼치는 나이다. 자연스레 발을 끊게 된다. 그렇다면 10년도 채 안 남은 셈이다. 일흔줄에 든 지도 한참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으로 찬바람이 불어온다. 10년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참살이의꿈 2025.01.27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무하마드 알리가 가장 위대한 복서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선수로서 이룬 업적 외에 인간적인 면에서도 존중받을 삶을 살았다. 인권을 지키고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알리(당시 이름은 케시어스 클레이)가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로 금의환향한다. 그러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은 여전했다. 어느 날 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부터 서비스를 거부당한 뒤, 그는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의 용기와 결단을 드러내 보이는 일화다. 그는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말콤 엑스에 감화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이름도 클레이에서 알리로 바꾸었다. 또한 베트남 참전을 거부해서 유기징역을 받고 챔피언 벨트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길위의단상 2025.01.26

파사성과 여강길 8코스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날 치고는 맑고 바람 없이 따스했다. 바깥나들이를 하자고 아내와  의기투합하여 불현듯 떠오른 장소가 파사성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지나치고 직접 오르지는 못한 성이었다. 파사성(婆娑城)은 여주시 대신면 파사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성이다.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성은 조선 시대에 다시 쌓은 것이며 성의 둘레는 1,800m이고 성벽의 최대 높이는 6.5m로 규모가 큰 편이다. 성 안에서는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여러 시기의 건물터가 확인된다. 파사산은 해발 230m로 야트막하지만 산성에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팔랐다.  파사성에 서면 남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사방이 뚫려 있어 경치가 좋다.   여강길 8코스 파사성길이 이곳을 지..

사진속일상 2025.01.25

겨울 여수천

지난 며칠간 추위가 가셨으나 대신 미세먼지가 자욱했다.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릿했다. 다행히 오늘부터는 대기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야탑 모임에 오가는 길에 걷는 여수천의 아침저녁은 을씨년스러웠다. 날이 풀리고 있지만 천변 산책로를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쪽에는 남아 있는 지난 눈의 잔해가 패잔병처럼 초라해 보였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물길을 따라 비둘기, 백로, 흰뺨검둥오리, 물까치 등이 보였다. 그중에서 물까치가 제일 활발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파란 하늘에 여객기가 흰 줄을 그으며 지나갔다. 프로펠러 군용기 한 대는 계속해서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구름 없는 서쪽 하늘이 발갛게 물들었다. 새들도 저..

사진속일상 2025.01.24

다읽(22) - 좁은 문

20대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작품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다. 기존의 가르침이나 규범을 타파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젊은 가슴에 울림을 줬다. 좋은 문장들은 노트에 필사하며 정독했던 기억이 난다. '나타나엘이여'로 시작하는 싱싱한 문장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반면에 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제목으로 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여겼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뭐, 사랑 이야기네"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이제 다시 읽어 본 은 젊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지드가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보인다. 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지 않나 싶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외사촌간인 제롬과 ..

읽고본느낌 2025.01.23

두루미를 보다가 / 유안진

하늘에 사는 이가잠깐 땅에 내려서는 것도미안하게 여겨외다리 맨발 한쪽만 딛고 서는저 겸손과 염치 있음에가슴 뜨끔해져있는가 아직도 용서 받을 여지가 - 두루미를 보다가 / 유안진  지난주에 철원에 가서 두루미를 봤다. 논에 산재해서 먹이를 먹고 있는 많은 두루미 가족을 보았다. 두루미 탐조대에서는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두루미와 만났으니 올 겨울도 가득 찬 셈이다. 두루미를 보면서 인간이 어떤 경지에 올라야 그들처럼 우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그런 것이었다. 시인은 겸손과 염치를 떠올리며 가슴 뜨끔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용서 받을 여지가 있을지를 묻는다.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할 놈은 철면피를 한 채 큰소리를 떵떵 치는 세상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게 부끄럽고 ..

시읽는기쁨 2025.01.22

토지(8)

8권은 2부의 마지막이다. 용정 생활을 마치고 10여 년 만에 서희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공 노인의 도움으로 조준구한테 빼앗긴 땅을 되찾고 귀향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인 길상은 서희와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고, 우국지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연해주에 남는다. 이 권에서 월선이 죽는다. 월선은 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다. 일편단심 한 남자를 사모하면서 갖은 고난을 겪다가 암에 걸려 죽게 된다. 대척점에 물욕으로 가득찬 임이네가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용이도 속깨나 끓였으리라. 산판 일을 마치고 열 달 만에 돌아온 용이 월선의 마지막을 지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8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읽고본느낌 2025.01.21

사기[35]

항우가 희하에서 진을 치고 유방을 치려고 하니 유방은 기마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항백을 통해 항우를 만나 함곡관을 막을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항우는 병사들에게 술자리를 열어 주었다. 범증은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유방을 죽이기 위해 항장에게 연회석에서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찌르라고 명령했지만, 위급한 순간마다 항백이 자기 어깨로 유방을 가려 주었다. 그때 유방과 장량만 군영 안으로 들어와 연회에 참석했고 번쾌는 군영 밖에 있었다. 번쾌는 상황이 긴급하다는 소식을 듣자 곧 바로 철 방패를 들고 군영 문 앞으로 가서 안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군영의 보초가 번쾌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번쾌는 방패로 그를 밀어젖히고 들어가 장막 아래에 섰다. 항우가 그를 보고 물었다."이자는 누군가?"장량이 대답했다."패공의..

삶의나침반 2025.01.20

다모클레스의 칼

BC 4세기 시칠리아에 있는 시라쿠사 왕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왕이 되어 보는 것이 소원인 다모클레스라는 신하가 있었다. 하루는 디오니시우스 왕이 다모클레스에게 하루 동안 왕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다모클레스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산해진미를 맛보며 왕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들을 보면서 천하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좌에 앉아 있던 다모클레스가 무심코 천장을  쳐다보니 머리 위에 예리한 칼이 가는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칼에 혼비백산한 다모클레스는 더 이상 왕 노릇을 못하겠다며 뛰쳐나왔다고 한다.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kles)'라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권력의 자리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24..

길위의단상 2025.01.19

두루미를 보고 물윗길을 걷다

철원에 가서 두루미를 보고 물윗길을 걸었다. 새로 개통한 세종포천고속도로를 이용하니 오가는 길이 수월했다. 추위가 가시고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오른 따스한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했다. 두루미를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은 동송읍 이길리에 있는 두리미 탐조대다. 주기적으로 먹이를 뿌려주기 때문에 두루미가 많이 몰려온다. 재두루미가 90%가량 되고, 적은 숫자의 두루미가 섞여 있다. 기러기와 고니도 있다.   이동하는 길 주변의 논에도 서너 마리씩 모여 있는 두리미 가족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올해만큼 두루미를 많이 본 적도 없었다. 행복한 날이었다.   오후에는 물윗길을 걸었다. 철원 물윗길 얼음 트레킹은 순담계곡에서 직탕폭포까지 한탄강을 따라가며 걷는 8.5km를 걷는 길이다. 고석정, 승일교, 내대양수장, ..

사진속일상 2025.01.18

아주 편안한 죽음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입원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묻는다. 70대 후반이었던 작가의 어머니는 대퇴부골절로 입원해서 암 진단을 받고 두 달가량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강인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자연히 보부아르와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으로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모녀간의 유대감을 확인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드러냄으로써 어머니를 애도하면서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책 중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 환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

읽고본느낌 2025.01.15

날아라 고니

경안천이 대부분 얼음으로 덮였다. 일부 얼지 않은 곳에는 고니와 기러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동장군에 맞서 물을 지켜내려고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 같다. 다행히 당분간은 강추위 예보가 없다. 새들이 놀 수 있는 터전이 이만큼이라도 계속 보존되면 좋겠다.  얘들은 한낮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휴식시간인 것 같다.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운 좋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고니를 볼 수 있다. 솟구쳐오르는 힘찬 날갯짓에 내 심장이 마구 뛴다. 유유히 비행하는 우아한 자태를 넋을 빼앗기고 바라본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근처에는 맹금류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냥할 생각이 가득한 듯하나 무리지어 있으니 공격할 엄두가 안 나는가 보다. 천변을 걷다 보면 새털이 무더기로 흩어져..

사진속일상 2025.01.14

개치네쒜

최근에 재미있는 우리말을 하나 알았다. "개치네쒜!" 재채기를 한 후에 내는 감탄사로, 이 말을 외치면 감기가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감기야, 물렀거라!'라는 뜻이다. 동시에 재채기를 한 당사자에게도 건강을 비는 의미가 있다. 영미권에서 쓰는 "Bless You"와 비슷하다. 대중교통을 탔을 때 옆에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짜증이 나고 눈총을 주게 된다. 마스크라고 쓰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어떤 사람은 입을 가리지도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무척 예민해져 있다. 버스 안에서 재채기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개치네쒜는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는 주문이면서 상대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좋은 말이다. 어원이 궁금한데 찾아봐도 분명하게 나와 있..

길위의단상 2025.01.13

토지(6, 7)

6권과 7권은 하동, 용정, 경성을 무대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다. 일제에 빌붙어 약삭빠른 처신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뿌리 없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향에서 쫓겨나 연해주나 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다행이랄까 서희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돈을 모으고 용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일본과 척을 지지 않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준구에게 복수하려는 일념 때문이다. 7권 끝에는 공 노인을 통해 조준구에게 옛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은밀한 복수 작업이 시작된다. 두 권에는 의병 및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펼쳐진다. 주로 옛 동학교도들이 모여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중심인물은 환, ..

읽고본느낌 2025.01.12

솟구쳐 오르기 1 / 김승희

억압을 뚫지 않으면억압을억압을억압을 악업이 되어악업이악업이악업이 두려우리라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절벽의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하늘 높이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을 때까지 아, 삶이란 그런 장대높이뛰기의 날개를원하는 것이 아닐까상처의 그물을 피할 수도 없지만상처의 그물 아래 갇혀 살 수도 없어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억압을 악업을그렇게 솟아올라아, 한번 푸르게 물리칠 수 있다면 - 솟구쳐 오르기 1 / 김승희  알고리즘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유튜브를 볼 때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알아서 찾아주니 편리하긴 한데, 세상을 보는 시야를 좁게 만드는 단점..

시읽는기쁨 2025.01.11

겨울이 좋지만

나는 겨울이 좋다. 이유는 단 하나다. 칩거하는 데 이만한 계절이 없기 때문이다. 겨울은 다른 계절처럼 바깥 날씨가 유혹하지 않는다. 나갈까 말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핑계는 충분하다. 따뜻한 아랫묵에서 딩굴딩굴하는 호사도 겨울이라야 누릴 수 있다. 옛날과는 차이가 있지만 아파트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영하의 찬바람에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종종거리며 지나간다. 학교로, 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내 처지가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겨울이 아니라면 이런 안온감과 포만감을 누가 주겠는가. 안과 밖의 대비가 겨울만큼 극적인 계절은 없다.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편안함이 이와 같을까. 바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도 정겹다.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

참살이의꿈 2025.01.10

사기[34]

그러고는 마침내 자기 목을 찌르며 빈객에게 자신의 목을 받들고 사신을 따라 말을 달려가 고제에게 아뢰도록 하였다. 고제가 말했다."아, 역시 까닭이 있었구나! 한낱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세 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는 두 빈객을 도위로 삼고 군졸 2000명을 뽑아 왕의 예를 갖추어 전횡을 장사하였다.그러나 장례가 끝나자마자, 두 빈객은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스스로 목을 메고 거꾸로 처박혀 전횡을 따라 죽었다. 고제는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놀라며 전횡의 빈객이 모두 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 나머지 500명이 여전히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을 시켜 불러오게 했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전횡의 죽음을 알리자 모두 스스로 목숨을..

삶의나침반 2025.01.09

찬바람 맞으며 경안천을 걷다

날이 추워졌다.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한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이틀 전이 소한(小寒)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소한이 대한네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무렵이면 한차례 추위가 지나갈 만한 때다. 앞으로 사나흘간 강추위가 몰려올 것이라는 예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경안천에 나갔다. 중무장을 했건만 찬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몸도 자꾸 수굿해졌다. 그러나 한남동에서 밤을 새우며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웠다.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앉아서 버틴 '키세스 시위대' 사진에 가슴 뭉클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툴툴댄단 말인가.  백로나 왜가리가 드문드문 눈에 띄고,  이 왜가리는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를 않는다. ..

사진속일상 2025.01.08

더 글로리

이 드라마가 방영될 즈음이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선배한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뒤에는 만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전화 통화조차 없었던 선배였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의 연락이었다. 카톡은 어렸을 때 나를 괴롭힌 일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선배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묘사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와 관련된 추억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은 황당한 마음으로 나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최근에 드라마 을 봤다. 2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학폭을 주제로 한 드라마다. 고등학생 때 일진들로부터 학대를 당한 피해자 문동은이 30대가 ..

읽고본느낌 2025.01.07

퍼펙트 데이즈

도쿄에서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며 살아가는 독신인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상은 규칙적이며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미소를 띠며 하늘을 쳐다보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고, 카세트페이프로 올드 팝을 들으며 출근하고, 정성을 다해 화장실을 청소하고, 신사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필름 카메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고, 단골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똑같은 루틴의 매일이다. 짜인 듯 틀에 박힌 생활이 답답할 것 같은데 히라야마는 더없이 행복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는 그의 절제된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꼼꼼하게 화장실을 청소하는 모습은 그가 인생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 말해준다.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대하..

읽고본느낌 2025.01.05

토지(3, 4, 5)

4권에서 1부가 끝나고, 5권부터는 2부가 시작된다. 1부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일강제병합이 되는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최참판댁은 몰락하고 마을 사람들과 간도로 이주하면서 1부는 끝난다.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은 조준구에 의해 서희는 집과 땅을 빼앗긴다. 젊은이들은 의병이 되어 마을을 떠나고 전염병과 흉작으로 평사리는 쑥대밭이 된다. 를 통해 1900년대 초의 나라 상황과 민초들의 삶을 그림으로 보듯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서희가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잠재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서희의 성격 묘사 중에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하다'는 표현이 이색적이었다. 2부는 2011년의 용정 마을 대화재로 시작한다. 불은 시가의..

읽고본느낌 2025.01.04

사기[33]

태사공은 말한다."한신과 노관은 본래 덕을 쌓고 착한 일로 처세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한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만났으므로 땅을 갈라 받고 왕 노릇 하며 고(孤)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지고 커졌다는 의심을 받았고, 나라 밖으로는 만맥을 원조자로 믿고 기댔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과 멀어지고 자신들까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지혜가 다하자 흉노로 달아났으니 이 어찌 애처롭지 않으랴!아. 슬프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어지러움이 사람에게 성공과 실패로 끼치는 영향은 또한 깊구나!" - 사기(史記) 3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공이 많은 ..

삶의나침반 2025.01.03

인생은 아름다워 / 쥘 르나르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눈이 보인다.귀가 들린다.몸이 움직인다.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인생은 아름다워. - 인생은 아름다워 / 쥘 르나르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요양병원 앞을 지나간다. 전에는 정신병원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으로 바뀌었다. 병원 주변은 항상 적막에 잠겨 있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보이기도 한다. 지나갈 때마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들은 안에 있고 나는 밖에 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이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날이 오면 쓰나미처럼 모든 걸 휩쓸고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낼 의무가 생명에게는 있다...

시읽는기쁨 2025.01.02

2025 첫날의 산책

열흘 만에 외출을 하다. 고뿔 손님을 접대하느라 밖에 나갈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랄까, 이제는 얌전해진 손님을 집에 두고 조심스레 동네 산책을 하다. 2025년의 첫날이다. "가는 년(年)은 가고, 오는 년(年)은 온다." 오는 년이라고 가는 년과 달리 특별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년이 그 년인 것이다. 1월 1일의 거리는 한산하다.  날은 맑고 포근하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번잡한 세상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여객기 한 대가 미미한 소리를 남기고 동쪽으로 날아간다.  어쩌다 보니 뒷산도 두 달 만이다. 산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받아준다. 박새가 이 가지 저 가지로 자발스럽게 옮겨 다닌다. 모든 것을 품은 산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대로 족하다!"  새해 첫날 점..

사진속일상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