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읽(22) - 좁은 문

샌. 2025. 1. 23. 10:03

20대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작품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지상의 양식>이다. 기존의 가르침이나 규범을 타파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젊은 가슴에 울림을 줬다. 좋은 문장들은 노트에 필사하며 정독했던 기억이 난다. '나타나엘이여'로 시작하는 싱싱한 문장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반면에 <좁은 문>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제목으로 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여겼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뭐, 사랑 이야기네"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이제 다시 읽어 본 <좁은 문>은 젊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지드가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보인다. <지상의 양식>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지 않나 싶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외사촌간인 제롬과 엘리사는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서양에서는 사촌간의 결혼을 흔히 본다). 엘리사의 동생인 쥘리에트도 몰래 제롬을 사랑하지만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제롬은 엘리사에게 청혼하나 엘리사는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엘리사는 지상의 인간적인 행복과 영혼의 종교적 구원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며 고민한다. 이런 방황이 10년 넘게 지속된다.

 

엘리사는 지상의 행복 대신 신에게로 향하는 성스러움을 지향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 양립하며 그녀를 괴롭힌다. 어느 날의 일기다.

"주여, 제롬과 저, 저희 둘이 함께 서로에게 인도되어 당신께 나아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형제여, 피곤하거든 내게 기대라' 하고 때때로 한 사람이 말하면, '내 곁에 네가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해....' 하고 상대방이 대답하는 두 명의 순례자처럼 내내 인생의 길을 걸어가도록 해주옵소서, 아니옵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희에게 가르치신 길은 좁은 길....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좁은 길이옵니다."

 

배경이 19세기 말이라 둘은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소설은 편지와 일기의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둘의 관계가 답답하다. 머뭇거리기는 제롬도 마찬가지다. 신의 부름과 청교도적 믿음에 매달리다가 엘리사는 하늘이 준 생명력이 고갈된다. 맞은편에 자연의 생기 가득한 쥘리에트의 삶이 있다. 지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다.

 

엘리사를 보며 내 20대가 떠올랐다. 한 시절 엘리사와 비슷한 생각으로 지상의 것들을 멀리한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안 가는 '좁은 문'을 억지로 찾아내어 열려고 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좁은 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성(聖)과 성(性)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아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지드는 이 소설처럼 실제로 외사촌 누이를 사랑했고, 결혼해서 사별할 때까지 반려자로 지냈다고 한다. 둘의 결혼 생활이 육체관계가 배제된 정신적인 사랑으로 일관했다니 <좁은 문>은 자신의 지향을 드러낸 자전적인 소설이라 볼 수 있다. 하늘로 향하는 길과 지상의 길,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상충되는 두 요소를 어떻게 조화롭게 엮어내느냐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생의 과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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