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가 방영될 즈음이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선배한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뒤에는 만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전화 통화조차 없었던 선배였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의 연락이었다.
카톡은 어렸을 때 나를 괴롭힌 일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선배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묘사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와 관련된 추억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은 황당한 마음으로 나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최근에 드라마 <더 글로리>을 봤다. 2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학폭을 주제로 한 드라마다. 고등학생 때 일진들로부터 학대를 당한 피해자 문동은이 30대가 되어 가해자들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내용이다.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있나 싶게 가해자들의 행위는 끔찍했다. 다른 피해자는 죽임까지 당했다. 겨우 살아남은 문동은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복수해 나간다.
내 고등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힘깨나 쓰는 애들이 있었지만 반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바깥 세상에서 놀았다. 오히려 반 아이들을 보호해 준 측면이 있었다. 그들은 어른스러웠고 반의 울타리였다. 요사이는 왕따니 학폭이니 하면서 가까이 있는 아이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것 같다. <더 글로리>에서도 연진은 동은과 같은 반이면서 악랄한 학대를 한다.
<더 글로리>는 일종의 정의 구현 드라마다. 나도 통쾌한 결말을 기대하며 보는 내내 동은을 응원했다. 세상은 권선징악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한 자가 떵떵거리며 산다. 비록 사적 복수일 망정 선이 악을, 약자가 강자를 깨부수는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용서를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드라마에서 바둑이 나오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동은은 복수의 수단 중 하나로 바둑을 배운다. 목적하는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해 바둑을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바둑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 것 같다. 동은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둑을 빨리 배웠어, 연진아. 목적이 분명했고,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니. 아름답더라."
성장기의 아이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히는 학폭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문동은처럼 복수나마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가해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고향 선배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연락을 해 오는 경우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