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가오는 말들

샌. 2019. 12. 10. 11:00

은유 작가의 산문집으로 작가의 색깔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글의 소재는 가족, 글쓰기 모임의 학인, 인터뷰를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눈 사연 중심으로 되어 있다. 글에는 세상과 인간을 보는 작가의 섬세하고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은유 작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그분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15년쯤 전일 것이다.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그때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부로서 아이를 키우며 느낀 감상을 진솔하게 써서 많은 공감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서태지 음악에 대한 얘기도 많았다. 그 뒤로 작가의 책은 나오는 대로 찾아 읽어 보았다. 영민하면서 문재(文才)랄까, 재기가 반짝이는 글이 좋았다.

 

<다가오는 말들> 역시 몇 줄만 읽어봐도 은유 작가의 글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반면에 약간은 식상해진 면도 있다. 사실 작가의 글 중에서 가장 임팩트가 강한 것은 예전 블로그의 글이었다. 그만큼 작가의 삶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은 그런 살아 있는 기백이랄까, 절실함이 그때만큼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평생을 가난과 긴장 상태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는 카피라이터가 되어도 성공했을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핵심을 찌르는 짧은 문장을 발견하는 기쁨이 크다. 이번 책에서 눈에 반짝 띈 문장은 이것이다. "글은 자기 생각을 의심하는 일이고, 말은 자기 확신을 전하는 일이다." 작가는 유명인이 되다 보니 강의도 자주 나가시는 것 같다. 아마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일 것이다. 글쓰기와 말하기의 차이가 이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

 

"차분히 불행에 몰두하세요"라는 글 제목도 좋다. 글의 초반부는 이렇다.

 

"그럼,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하루는 이메일 말미에 붙어 있는 저 인사말에 눈길이 머물렀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구문인데 그날따라 아리송했다. 왜 행복해야 되지? 꼭 행복해야 하는 건가? 행복하라는 말은 부자되라는 말보다 덜 속되고 선해 보이지만 도달 확률이 낮다는 점에선 더 잔인한 당부이기도 했다. 아무리 용쓰고 살아도 불행이 속수무책 벌어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행복하라는 건지 의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안 행복하니까 심통이 나서 삐딱해졌으며 '덕담'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불만 분자가 됐는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검열했다. 아무튼 그 뒤로 나는 이 요망스런 '행복'이란 두 글자를 내 사전에서 지웠다.

 

인생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불행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실체도 없는 행복을 좇아가다 보면 늘 허탈이 남았다. 인생은 그네타기와 비슷한 게 아닐까. 앞으로 길게 나갈수록 그만큼 뒤로 밀려나게 된다. 나도 이제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습관적으로 남용하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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