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89

떠나가는 가을

서점에 주문한 책을 찾으러 갔는데 일요일이 문 닫는 날인 걸 깜빡 했다. 빈 배낭을 메고 경안천에 나가서 떠나가는 가을과 함께 했다. 영은미술관 뜰에는 가을이 남긴 흔적이 가득하다.  가을이 떠나가면 고니가 찾아올 거야.   경안천에는 백로가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 길 떠날 채비를 하는가 보다. 먼 길 떠나자면 길동무가 필요하겠지.  곧 겨울이 다가온다고 수근거리는 소리들.  아파트 뜰의 수양단풍나무는 마지막 치장이 화려하다.   다음주에는 기온이 더 떨어진다고 하고 첫눈 예보도 나와 있다. 가을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겨울옷을 꺼내 장농에 건다. 그렇게 한 계절이 가고 새 계절이 온다.

사진속일상 2024.11.24

여수천의 늦가을

여수천을 걸어서 야탑에 나가다. 여수천 주변은 늦가을을 장식하는 단풍으로 곱다. 노을이 그러하고, 단풍이 그러하고, 사라지는 것들은 이리 아름답다.   11월 하순인데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 잎도 보인다. 일부만 붉게 채색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초록색이다. 이러다가는 12월에도 단풍이 남아 있겠다. 일본 기상청 자료를 보면 일본에 단풍이 찾아오는 시기가 70년 전보다 19일 정도 늦어졌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다. 앞으로는 12월 단풍도 드문 말이 아닐 것이다.  나뭇잎은 생의 끝에서 자기의 고유한 색깔로 빛난다. 생명의 활력으로 충만하던 여름에는 서로간에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 속에서 부..

사진속일상 2024.11.22

장모님 모시고 진안 나들이

전주에 내려간 길에 장모님에게 바깥바람을 쐬 드리기 위해 진안으로 함께 가을 나들이를 나갔다. 걸음이 불편하시니 주로 차 안에서 가을 풍광을 즐기실 수밖에 없었다. 산야는 가을로 무르익고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부귀면 세동리에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이었다. 옛 도로를 따라 모래재를 넘으면 500m 정도 메타세콰이어가 길게 늘어선 이 길을 만난다. 1980년대에 심었다니 수령이 40년이 되는 메타세콰이어들이다. 노랗게 물들어서 더욱 예쁜 길이었다.   다음에는 사양저수지에 들렀는데 마이산 두 봉우리를 배경으로 하는 경치가 좋았다.  천황사에서는 곱고 선명한 단풍을 만났다.  14년 만에 다시 만난 천황사 전나무다.  용담호 주천생태공원에서 가을 분위기에 빠졌다. 장모님은 조심스레 걸으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진속일상 2024.11.14

동네 추경(秋景)

아직 완숙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도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인간의 마을에도 숲에도 가을 향기가 가득하다. 화려하기로 치면 이맘때의 가을과 필적할 계절은 없다. 가을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받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한낮의 추광(秋光)이 따스했다. 고운 단풍 따라 내 마음도 곱게 물드는 것 같았다.  뒷산 숲에는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오솔길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했다. 촌촌가인인생(村村家人人生)이던가, 우리의 삶도 나뭇잎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 움이 돋아 여름, 가을을 지나 흙으로 돌아간다. 대자연 순환의 흐름 속 시절인연이 나를 이 순간 이 자리에 있게 한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사진속일상 2024.11.04

뒷산에 오르다

여름 동안 뒷산에 들지 못했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산모기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여름 산의 모기는 2차세계대전 때 미국 군함을 향해 돌진하던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들 같다. 전에는 손수건을 휘저으며 기어코 오르기도 했으나 요사이는 귀찮아서 아예 산가까이 가지를 않았다. 그러니 뒷산 들기가 거의 다섯 달만이었다. 가을이 되니 성가시게 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산길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눈에 띄지 않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만 숲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와서인지 숲은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경건한 예배당에 든 듯해서 살금살금 걸은 숲길이었다.  법정 스님은 어느 글에서,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머스마'인 스님들을 설레게 한다고 썼다.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가 되면 선원이고 강원이고 절 안이 텅텅 빈다는..

사진속일상 2024.10.10

가을 오는 하늘

가을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한낮 햇살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풀벌레들 노랫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간다. 하늘도 가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났는지 더 푸르러 보이고, 구름 모양도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붓을 부드럽게 터치해서 그린 듯한 권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꽤 오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변신을 했다. 하늘이 연출하는 변검술이었다. 하늘 하나만으로도 오가는 길이 즐거웠다. 이 또한 파적(破寂)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흐뭇해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사진속일상 2024.09.01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

시읽는기쁨 2023.11.14

강원도 가을 여행(3) - 십이선녀탕, 박인환문학관

여행 셋째 날, 따뜻한 아침 식사를 지어먹고 느지막이 출발했다. 돌아올 때는 인제를 지나는 국도를 타기로 했다. 미시령터널을 지나니 금방 설악산 십이선녀탕 입구에 도착했다.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으므로 계곡 초입부를 한 시간여 여유롭게 산책했다. 입구에는 단체로 온 관광객으로 붐볐으나 계곡에 드니 한산해졌다. 수수한 갈색 계열의 계곡 단풍이 예뻤다. 바위에 앉아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 볼까 했으나 날이 흐려져서 포기했다. 일기 앱에는 비 예보가 떴다. 대신 시간 여유가 생겼고, 인제읍에 있는 박인환문학관을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문학관 1층에는 시인과 관련된 옛날 거리를 재현해 놓아 특이하면서 흥미로웠다. 시인은 해방 후 20세 때 종로 3가에 '마리서사(茉莉書舍)..

사진속일상 2023.10.29

강원도 가을 여행(2) - 성인대, 중앙시장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밖에 나오면 잠을 설친다. 익숙한 잠자리가 아닌 탓이다. 특히 베개가 문제다. 다음부터는 내 베개를 갖고 다녀야 할지 고민을 해 봐야겠다. 젊었을 때는 아무 데서나 단숨에 잠들었는데 늙어서는 잠이 까다로워졌다. 외부 잠자리의 불편은 여행을 다니는 것이 귀찮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일찍 잠을 깨서 빈둥거리다가 바깥 산책에 나섰다. 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숙소에서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정면으로 보였다. 여행 둘째 날은 울산바위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성인대에 오르는 날이다. 이쪽은 외설악이나 내설악만큼 단풍이 화려하지 않고 차분하다. 성인대(聖人臺, 645m)는 화암사(禾巖寺)에서 오른다. 절 안내문에는 '금강산 화암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산줄기는 금강산에 속하는가 보..

사진속일상 2023.10.28

강원도 가을 여행(1) - 발왕산, 낙산해변

아내와 2박3일의 강원도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먼저 용평리조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발왕산(發王山, 1458m)에 올랐다. 천년주목숲길을 걸어보기 위해서였다. 케이블카 캐빈은 8인승인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대기 없이 바로 탈 수 있어서 둘이서만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블카는 3.7km 길이에 20분 정도 걸렸다. 꼭대기에는 스카이워크가 있어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서 사방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발왕산 높은 곳은 단풍의 끝물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발왕산 정상부에는 약 3km 길이의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길은 경사가 완만한 나무데크로 되어 있어 노약자도 힘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오래된 주목들을 지나게 되어 있어 갖가지 형상의 주목을 만나는 길이다. 여기서 만난..

사진속일상 2023.10.27

가을 젖는 뒷산

가을이 안개비 내리듯 산하를 적신다. 뒷산에도 가을 기운이 스며들어 촉촉이 젖고 있다. 이 계절에는 혼자 산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철인(哲人)이 되기에, '고독한 산보자'의 흉내를 내기에, 딱 알맞은 때가 아닌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겸허해 보인다.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함부로 라디오를 틀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사람은 계절의 분위기를 닮아갈 수밖에 없는가 보다. 가을 속에 잠겨드는 뒷산을 조심스레 걸었다. 소멸을 앞둔 존재들과 눈맞춤하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래, 더 외로워도 괜찮은 거지!

사진속일상 2023.10.07

가을을 느껴보는 산책

주말에 손주가 왔다가 코로나가 확인되어 일찍 제 집으로 돌아갔다. 늘상 있는 감기 정도로 알았던 모양이다. 요사이 코로나는 증세가 심하지 않고 전염력이 약한 대신 오래간다고 한다.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들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지혜를 얻은 것 같다. 근 일주일만에 집 밖으로 나와 동네 산책에 나섰다. 몸은 완전히 회복했다. 동네의 근린공원과 주변은 가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길에는 낙엽이 보이기 시작하고 알을 꺼낸 빈 밤송이도 흩어져 있었다. 공원에서 가을물이 제일 먼저 드는 것은 벚나무 잎이다. 작은 구슬이 옹기종기 달려있는 좀작살나무 열매의 보라색도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색깔이다.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타고 노는 모습을 재미나게 지켜보았다. 딱새 암컷이 아닌가 싶다. 곧 산하가 울긋불긋..

사진속일상 2023.09.18

전주향교 은행나무(2022/11/4)

늘 노랗게 물든 이 은행나무를 보고 싶었다. 전주향교에 있는 은행나무는 여러 차례 대면했지만 이번처럼 가을에 만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지금도 완전한 절정기는 아니다. 며칠 더 있어야 샛노랗게 물들 것 같다. 은행나무 밑에서는 아기 돌사진을 찍으러 나온 어느 가족의 웃음소리가 낭랑했다. 가족 모두 한복을 입고 전문 사진사의 요청에 따라 재미있는 포즈를 취한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은행나무 낙엽 위를 기어 다니느라 바쁘다. 가을의 막바지에 새로 태어난 생명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가고오는 순환의 원리를 가을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쓸쓸하면서 동시에 흐뭇한 마음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천년의나무 2022.11.08

전주에 다녀오다(11/2~5)

아내와 전주에 내려가서 나흘간 머무르다 왔다. 장모님과 바깥나들이를 나가서 가을 구경시켜드리는 게 목적이었다. 오가는 길에 우리 역시 가을 풍광을 즐기는 건 덤이었다. 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서 황새바위 성지와 공산성을 찾았다. 공주에 대한 기억이 까마득하다. 공주를 마지막으로 찾은 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으니 적어도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다시 찾아보기가 이렇게 어렵다. 공산성 앞에 선 황금빛의 무령왕 동상이 눈길을 끈다. 공산성(公山城)은 이곳이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에(475~538년) 도읍지인 웅진(熊津)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성 둘레는 약 2.5km로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공산성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사비성에서 도망친 ..

사진속일상 2022.11.06

행복호 / 윤보영

가을 타세요? 그럼 타세요 사랑으로 밀어드릴게요 - 행복호 / 윤보영 '타다'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사전에 나온 설명은 이렇다. 타다 1. 탈것이나 짐승의 등 따위에 몸을 얹다. 2. 불씨나 높은 열로 불이 붙어 번지거나 불꽃이 일어나다. 3. 몫으로 주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받다. 4. 다량의 액체에 소량의 액체나 가루 따위를 넣다. 5. 먼지나 때 따위가 쉽게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다. 6. 부끄럼이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나 간지럼 따위의 육체적 느낌을 쉽게 느끼다. '가을을 탄다'라고 할 때의 '타다'는 6번의 의미이고, 시의 제목으로 쓰인 '행복호'는 1번의 의미로 쓰였을 테다.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용한 재미있는 시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계절 변화로 나타나는 우울증을 가리킨다. 기온이 떨..

시읽는기쁨 2022.11.01

우리 동네를 물들인 가을 색깔

경안천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가 동네 단풍에 홀려서 가야 할 곳을 잊어버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내 곁의 단풍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 가을 색깔에 취해서 아파트 단지를 놀멍쉬멍 돌아보는 데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입주한 지 십 년이 넘었으니 단지 안 나무들도 어느 정도 무성해졌다. 이곳 나무들은 사계절 중에서 이맘때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각자의 색깔로 성장(盛裝)한 청년기의 매력이 넘쳐나는 나무들이다. 감탄사 없이 지나칠 수 없는 이 가을이 어느 누구에게는 가장 슬픈 색깔이 될지 모른다. 희희낙락하는 뒤편 그늘에는 울음조차 사치스러운 아픔이 있다. 세상의 비극은 가없이 깊은데, 가을빛은 눈부시게 반짝인다.

사진속일상 2022.10.31

2022년 남한산성의 가을

가을 속에서 가을을 만나러 남한산성에 갔다. 이번에는 장경사를 기점으로 해서 성곽을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가을이 잘 익은 맑은 날이었다. 남한산성에는 단풍나무가 드물어 산 색깔이 화려하지는 않다. 동문 주변도 갈색 톤으로 물들었다. 사람이 많을 남문과 북문 구간을 피하기 위해 개원사로 내려와서 산성리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향했다. 주 성곽에서 벗어나 남한산 정상까지 다녀왔는데 새롭게 정상 표지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상부는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표지석은 실제 위치에서 100m 정도 벗어난 곳에 있다. 산하를 물들인 가을 색깔이 은은하며 고왔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1624년(인조 2)부터 쌓기 시작해서 2년 뒤에 완성한 성이다. 축성 작업에는 주로 군인과 승려들이 동원되었..

사진속일상 2022.10.28

가을이 무르익는 검단산에 오르다

가을이 무르익는 검단산에 올랐다. 기점은 윗배알미다. 윗배알미는 집에서 가까우면서 외진 곳이라 찾는 사람이 적어 좋다. 언제 가도 산길이 한적하다. 산 전체를 전세 낸 듯 혼자 독차지한다. 윗배알미 산길은 계곡을 끼고 있어 청량한 가을 물소리를 옆에 두고 걷는다. 계곡의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계절마다 다르다. 이 계절에는 살을 모두 발라내고 남은 생선뼈 같은 소리를 낸다. 오르는 길은 단풍이 화려했다. 검단산 단풍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가을 향연에 초대받은 횡재를 했다. 검단산 정상은 조망이 좋다. 북쪽 방향으로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남쪽에는 팔당호와 양수리/두물머리가 있다. 내려오는 길도 단풍 구경으로 황홀했다. 갑자기 강원도 정선의 동강 따라 단풍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사진속일상 2022.10.26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어제 친구와 통화하면서 옛 동료의 투병 소식이 화제에 올랐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분인데 지금은 인지 능력이 떨어져 친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신다는 전언이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다. 통계에 의하면 80세까지 생존 확률이 30%라는 것이다. 지금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의 70%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때가 10년도 안 남았다. 물론 내가 포함될 확률도 70%다. 100세 시대라고 떠들면서 오래오래 살 것 같..

시읽는기쁨 2022.10.25

가을이 성큼 다가오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기온이 떨어져서 아침저녁에는 쌀쌀하기까지 하다. 밤에 잘 때는 창문을 모두 닫아야 한다. 여름 이불은 거두어 세탁기에 넣었다. 계절의 변화가 거인의 발걸음처럼 한순간에 닥치니 깜짝 놀란다. 가을 하늘이 좋아서 집을 나섰다. 경안천을 걸으면서 온통 하늘에 마음을 뺏겼다. 뒤돌아 본 남쪽 하늘에는 비취색 구름이 떴다. 파란 하늘에 비단 조각처럼 걸린 비취운(翡翠雲)이었다. 경안천 건너편으로 건너갈 돌다리가 지난 폭우로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왜가리, 백로, 오리가 사이좋게 이웃하며 쉬고 있다. 이런 날의 햇살은 보약과 같다. 얼굴을 간지리는 햇살을 담뿍 받아들였다. 무거운 몸이지만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면서 가을을 맞으러 나간 길이었다.

사진속일상 2022.08.28

반짝이는 가을빛에 이끌려

반짝이는 가을빛에 이끌려 점심을 먹고 뒷산에 올랐다. 그냥 집에 있기에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였다. 오랜만에 올라본 뒷산은 이미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뒷산에는 단풍나무가 없다. 8할 이상이 참나무 종류다. 그래서 가을 단풍은 황색이 주종을 이룬다. 같은 황색 계열이더라도 나무에 따라, 단풍 드는 시기에 따라 색깔이 무척 다양하다. 일 년 중 숲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단장을 할 때다. 뒷산은 가볍게 오른다. 배낭도 없이 맨몸으로 오르니 다이어트를 한 뒤 마냥 가뿐하다. 그동안 등산으로 몸을 길들여놓은 원인도 클 것이다. 산 속은 온통 가을의 한복판이다. 이런 때 시 몇 편 꺼내 읽어보는 건 또 어떠리.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

사진속일상 2021.11.03

늦가을 뒷산

늦가을이 되면 산은 순해진다. 자신을 비우고 가벼워진 존재가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이 덜 다니는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다. 흐릿해진 경계 위를 따라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긴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아래서 부서진다. 하늘 열린 공터에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총도 없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은폐, 엄폐 대신 최대한 노출을 많이 시켜야 수확물이 많은 이상한 사냥이다. 옆에는 골프장이 있다.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공이 날아가고, 이어서 "나이스 샷" 하는 외침이 후렴처럼 따른다. 10년째 지켜보지만 아직 무슨 골프장인지 이름도 모른다. 단지 안 단풍나무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코로나로 멀리 나가는 단풍 구경을 못 했지만, 바로 옆에서 이런 화려한 향연을 즐길 ..

사진속일상 2020.11.11

가을 속 우리 동네

어딜 가든 울긋불긋 단풍색이 고운 때다. 집 주변을 산책만 해도 다양한 가을 색깔을 즐길 수 있다. 이웃 동네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고갯길 주변 단풍이 볼 만하다. 내년이면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예정대로 공사가 시작되면 올해가 마지막 단풍이 될 것 같다. 이 나무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슬픈 눈으로 지켜봐야 하겠지.

사진속일상 2020.11.01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자리에서 일어나면 싸늘한 기운이 적당히 기분 좋다. 자동으로 창문을 열던 손길도 멈추었다. 창 곁에 다가와 있던 안개가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그 빈 자리를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채우기 시작하는 아침이다. 시인을 따라 내 가을의 소원은 뭐가 있을까를 들여다본다. '소원 없음'으로 소원을 삼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라는 건방진 생각도 해 본다. 쉼 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가운데 자연은 그대로 여여(如如)하거늘...

시읽는기쁨 2020.09.28

11월의 마지막 날

10월의 마지막 날은 떠나가는 옛 사랑이 뒤돌아보며 보이는 씁쓸한 미소라면, 11월의 마지막 날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옛 사랑의 뒷모습이다. 11월은 이 계절만이 가지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주변은 떠나가는 것들의 따스한 송별사로 가득하다.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11월의 쓸쓸함이 좋다. 음식이 오래 씹을 수록 단맛이 나듯 쓸쓸함도 그러하다. 한 장 남은 달력의 아쉬움도, 쓸쓸함과 다불어 함께 즐길 일이다. 11월의 마지막 날, 여주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카페라떼, 목련차, 셋이 마주보며 앉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을 생각한다. 깊은 허공 같은 무상(無常)을 생각한다.

사진속일상 2019.11.30

괴산 가을 나들이

아내와 괴산에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산막이옛길을 걸으러 가는 길에 이왕이면 단풍 구경할 겸 주변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를 나와서 처음 들린 곳은 수옥폭포였다. 조선 숙종 시기에 연풍 현감으로 있던 조유수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수옥정(漱玉亭)이라 이름한 데서 수옥폭포라 불렸다고 한다. '구슬을 씻듯' 영롱하게 떨어지는 폭포라는 뜻일까. 암반과 어우러진 폭포 주변의 경치가 뛰어났다. 폭포로 오가는 길의 단풍이 무척 아름다웠다. 다음에는 쌍계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을 따라가는 드라이브 길이 깊은 강원도에 온 것 같이 깊었다. 계곡의 비경을 다 보지는 못하고 소금강휴게소까지만 다녀왔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을의 빛을 감상했다. 산막이옛길 걷는 것만 아니라면 더 깊숙이 들어가며 ..

사진속일상 2019.11.05

혼자 걷는 뒷산

가을 짙어가는 뒷산을 혼자 걷다. 소문난 장소를 찾지 않아도 가을은 바로 옆에 와 있다. 나만의 산길이 무척 호젓하고 좋았다. 두 시간여 산길에서 딱 한 사람밖에 만나지 못한 나를 위한 길이었다. 세상의 일에 대한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직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도 있다. 지상(至上)의 행복은 지상(地上)의 일을 떠나 있다. 오늘처럼 뒷산을 홀로 걸을 때 오로지 존재에서 오는 행복을 잠깐 맛본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은 환자복을 입은 분이었다. 뒷산 밑에 요양병원이 있는데 주로 중환자가 계신다. 아내가 봉성체 봉사하러 이 요양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데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분은 환자복 위에 겨울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사진속일상 2019.11.02

가을바람의 유혹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결혼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잘 쓰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해서 후회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안 했다면 혼자만 후회하면 된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세상을 위해서는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안 하는 게 차라리 공익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 꺼야?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바보 같은 사람도 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달콤한 말 듣기를 바라는 걸까. 만약 아내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결혼하지 않을 거야!" 현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서가 아니다. 내가 결혼 생활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와 맞추고 어울려 살아갈 마음 바탕이 부족하..

참살이의꿈 201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