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의 시 / 장석주

샌. 2023. 11. 14. 10:47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 가을의 시 / 장석주

 

 

반어법을 사용한 가을의 기도다. 가을은 소녀의 감성에 젖게 하지만, 이렇듯 도발적이고 전투적이 되게도 한다.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에게서는 재물을 빼앗고, 학자는 치매에 걸리라고 한다. 이는 가던 길을 멈추라는 자연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때를 아는 나뭇잎은 어머니의 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영양분이 공급되는 통로를 끊고 제 일생에서 가장 예쁜 단장을 하고서 바람에 몸을 맡긴다. 가을이 되면 동물들의 숨결도 순해진다.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 가을의 낭만에만 매몰되어서는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노자는 말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功遂身退 天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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