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한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가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지난주에 인제에 있는 박인환문학관을 찾아서 시인을 추억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연보를 보면서 시인이 불과 31세에 요절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을 좋아했던 시인은 이상의 기일을 맞아 사흘 밤낮을 통음하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마와 숙녀'는 시인이 죽기 다섯 달 전에 썼다니 생애의 끝에서 나온 시인의 대표작이다.
김수영 시인이 박인환 시인의 시를 잔인할 정도로 평가절하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려 다녔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질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았나 싶다. 삶의 태도라든가 시작(詩作)의 경향이 완연히 구별되어 보인다. 아무래도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 인식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를 신문기사만도 못하다고 힐난했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가운데 감상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다. 박인환 역시 김수영을 '비겁한 현실주의자'라고 무시했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인환의 시에 전후의 사회 현실에 대한 고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의 사회 참여를 온몸으로 주장하던 김수영과는 달랐다. 박인환의 시는 서구적 이미지와 낭만, 도시적 감상으로 가득하다. 또한 전후의 영향 탓일 듯한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렇다고 박인환의 시를 김수영의 시보다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가슴 시린 공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을에는 '목마와 숙녀'가 전해주는 쓸쓸한 감상에 진하게 젖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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