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한낮 햇살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풀벌레들 노랫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간다.
하늘도 가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났는지 더 푸르러 보이고, 구름 모양도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붓을 부드럽게 터치해서 그린 듯한 권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꽤 오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변신을 했다. 하늘이 연출하는 변검술이었다.
하늘 하나만으로도 오가는 길이 즐거웠다. 이 또한 파적(破寂)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흐뭇해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시다.
뜨거운 시간의 여진도 구월까지지
그뒤에는 단풍 드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지
산도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어딘가 희끗희끗해지고
긴 옷으로 여윈 팔을 가려야 하는 아침이 오지
나뭇잎은 어떤 예감에 몸을 떨지
사랑이 깊어질수록 불안은 깊어지고
혼자 뒤척이다 우리도 어떤 예감과 마주치지
도토리 한 알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다람쥐가 알아듣고 꼬리를 바짝 세우는 날
절정에서 떨어져 깨지는 열매를 보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운명의 기척에
귀를 쫑긋 세우며
소란한 숲의 소리 중에 어떤 소리를
가려듣는 날이 있지
느티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저녁
알면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숲에 가을이 내리는 걸 막을 수 없듯
사랑에도 가을이 오는 걸 막을 수 없지
모든 사람은 사랑의 가을을 거쳐 간다는 걸
가을은 알고 있지
- 예감 / 도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