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짙어가는 뒷산을 혼자 걷다. 소문난 장소를 찾지 않아도 가을은 바로 옆에 와 있다. 나만의 산길이 무척 호젓하고 좋았다. 두 시간여 산길에서 딱 한 사람밖에 만나지 못한 나를 위한 길이었다.
세상의 일에 대한 성취나 소유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직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도 있다. 지상(至上)의 행복은 지상(地上)의 일을 떠나 있다. 오늘처럼 뒷산을 홀로 걸을 때 오로지 존재에서 오는 행복을 잠깐 맛본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은 환자복을 입은 분이었다. 뒷산 밑에 요양병원이 있는데 주로 중환자가 계신다. 아내가 봉성체 봉사하러 이 요양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데 환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오늘 산길에서 만난 분은 환자복 위에 겨울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채 천천히 산책하고 계셨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50대쯤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아마 암 투병 중이신 분이 아닌가 싶다. 산길에서 둘은 서로 마주치며 멀어졌다. 나는 안다. 지금 내가 건강한 건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란 것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분을 위해 기도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가을이 인생의 마지막 계절로 애절하게 다가올 것이다. 누구에게는 내일의 태양조차 약속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내 발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그때가 다가오는 건 누구나 예외가 없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훌훌 털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잠시 지상에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듯이, 그리고 봄이 되면 나무에는 다시 새 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저 모퉁이 돌아가니 깔깔거리며 쫓아다니는 아이들 소리 경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