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벌새

샌. 2019. 12. 2. 11:52

 

올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 나의 올해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1994년,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은희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영화다.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가 있었던 해다. 김보라 감독의 연출력이 탄탄하고, 특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진지하면서 따스한 시선이 좋다.

 

'벌새'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영지 샘이다. 은희를 진정을 다해 이해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준다. 학원의 한문 강사를 넘어 인생의 스승, 멘토라 부를 만하다. 은희는 영지 샘을 만났기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영지 샘은 서울대를 휴학한 운동권 학생이다.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는 소녀에게 주는 격려와 충고 이상의 인생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평생 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영지 샘이 은희에게 한 말 중 일부다. 고통을 겪고 고뇌하는 자만이 타인의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언어보다는 말없이 은희를 지긋이 지켜보는 영지 샘의 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 샘이 은희에게 하는 말에서 여러 차례 울컥했다. 아마 감독은 영지 샘을 통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같다. 힘든 시절을 지나고 있는 사춘기 소녀에게 주는 따뜻한 언어들이다. 은희는 나중에라도 영지 샘의 말을 기억하며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영지 샘 같은 분이 있었더라면' 하고 영화를 본 누구나가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1994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생각했다. 밖에서는 학교 선생이었고, 집에서는 은희처럼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아버지였다. 아마도 영화에 나오는 강압적인 학교 선생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결코 영지 샘 같은 마음을 주는 선생이 되지 못했다. 되돌아보면 그게 제일 아쉽고 후회된다.

 

'벌새'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서른 개가 넘는 상을 받으며 호평을 받고 있다. 1994년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기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사랑과 연민의 따스한 시선으로 담았기에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리라. 젊은 김보라 감독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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