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한 편 봤다. 1950년대에 제작한 '7인의 신부'다. 미국에서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에 나온 대표적인 영화다.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배경은 19세기 중반 애리조나주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남자 7형제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아가는데 장남 아담은 마을에 내려왔다가 식당에서 일하던 밀러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동생들도 마을 축제장에 갔다가 동네 아가씨들에게 반해 결혼을 꿈꾼다. 결국은 아가씨들을 납치해 오게 된다. 눈사태로 길이 끊기고 긴 겨울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고 봄에 모두가 결혼하게 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요소가 많다. 그러나 19세기라는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그리 무리한 설정도 아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보쌈'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자들은 마초적 기질이 있고 그걸 자랑하지만 순수한 면도 보인다. 뮤지컬 영화니까 당연히 춤과 음악이 볼 만하다. 그중에서도 마을 축제장에서 동네 청년들과 구애의 춤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최고다. 댄스에 리듬체조가 결합하여 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흥겨워진다.
'7인의 신부'를 처음 본 것은 종로 낙원상가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에서였다. 기억이 맞다면 1972년 연말이었다. 당시 허리우드 극장은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최신 영화관이었다.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서 표를 끊어줘서 가르치던 아이와 함께 봤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저녁까지 먹었는데, 연말 분위기로 들뜬 거리 모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당시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거의 가정교사였다. 대학에 있는 소개소에서 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신문 광고를 냈다. 광고를 내면 여러 군데서 전화가 왔다. 그중에서 조건이 좋은 쪽을 골라 갈 수 있었던 건 다니던 학교의 네임 밸류 때문일 것이다. 집에 전화가 없어서 잘 사는 이웃집 전화번호를 빌렸는데, 집에 있다가 전화 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부리나케 뛰어갔다. 귀찮을 법도 한데 아주머니는 늘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담장은 있었지만 이웃간에 마음의 담은 없던 시절이었다.
가정교사로 여러 아이를 가르쳤지만 허리우드에서 영화를 같이 본 같이 본 그 아이네 집 분위기는 특이했다. 가정교사를 뒀지만 아이나 어머니나 공부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 썼다. 공부 대신 영화나 공연장에 가라고 가끔 표를 끊어다 줬다. 나로서는 사양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쿨하고 사무적이었는데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말이 없고 이지적이었으며 속은 깊었다. 여느 가정과 다른 분위기 때문에 그 집과 아이가 기억에 남아 있다.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개인 중심의 인간관계가 편리한 점도 있었다. 그때 단발머리 여중생은 지금은 환갑 전후 나이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1972년에 박정희는 장기 독재의 시작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몇 해 전부터 대학가는 교련과 독재 반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즈음일 것이다. 박정희의 시찰 행렬이 우리 학교 캠퍼스 앞을 지나는데 학생이 던진 돌이 대통령이 탄 1호차에 맞았다. 학생이 데모를 하더라도 코스를 바꾸지 말고 가라는 대통령의 무리한 명령으로 생긴 돌발 사고였다. 화가 난 대통령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학교 정문으로 걸어갔다. 대통령을 알아본 학생들은 혼비백산하여 캠퍼스 안으로 숨었고, 박정희는 학생 지도를 똑바로 하라고 교수들을 질책했다. 대통령이 떠난 뒤 경찰이 진입해서 교내에 있는 학생들을 다 잡아갔다. 나는 그때 공릉동 캠퍼스에 있어서 현장에는 없었지만 운만 좋았으면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질 뻔도 했었다. 하여튼 시위대와 겁 없이 대면한 박정희의 강단은 알아줄 만했다. 도리어 학생들이 먼저 기가 눌려버린 사건이었다.
나는 데모대 꽁무니만 따라다녔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과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매몰돼 있었다. 지금 대학생들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지만 우리 때는 달랐다. 놀아도 대학을 졸업만 하면 직장은 구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장 가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업이 경쟁하던 시대였다. 그러니 넘쳐나는 게 시간이고 자유였다. 일부 학구파와 거리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며 보냈다. 지나고 보니 많은 부분이 청춘의 낭비였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는 전공은 내팽개치고 뜬구름 잡는 진리 추구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엉뚱하게도 기독교에서 답을 찾고자 교회를 나간 해가 또한 1972년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역시 허공에 대고 한 헛발질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길거리에 나가 처음 돌멩이를 손을 잡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선명하다. 내가 뭐 하는 거지, 라는 의문과 함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질끈 눈을 감고 힘껏 던지고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에 놀라 줄행랑을 놓았다. 선배들 따라 행렬에 끼었지만 민주나 독재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그 뒤로도 가슴 뛰는 열정으로 구호를 외쳐본 적은 없었다. 나는 돈키호테가 아닌 전형적인 햄릿형이었다.
교회 청년회는 대학생은 몇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인근 공장에 다니던 가난한 청춘들이었다. 나 같은 책상물림이 무슨 세상을 알겠는가. 그들로부터 살아가는 생생한 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청년회 모임이 끝나면 막걸릿집으로 가서 2차를 가졌다. 처음 듣는 그들의 언어는 새롭고 생경했다. 술에 취하면 울분이 분출하는지 그들은 험악해지기도 했다. 대학생 모임이 청년회에서 분리되고 나서는 그들과 멀어졌다. 깊이 대화가 통할 수는 없었지만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 줬는데 나는 빈부 문제나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했다.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그게 무척 미안하다.
영화를 보다가 1972년 즈음의 과거로 빠지고 말았다. 대학교 2학년생이던 스무 살의 내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 푸르지만 연약한 젊은이가 물었던 질문은 아직 내 가슴에 살아 있다. 구하기만 하지 답이 아득히 먼 것은 그때나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은 답을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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