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계급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은 영화다. 우리만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 어디나 양극화 문제는 심각하다.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다수는 점점 가난과 소외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계층 사이의 이동이 불가능하면 계급사회가 되는 것이다. 계급 차이는 갈등을 낳고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서는 루저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병든 노모를 모시고 힘들게 살아간다. 영화는 그가 사회로부터 멸시와 조롱, 폭력까지 당할 때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커의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동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 악마로 변하는 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섬뜩하고 강렬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조커'는 영화 '기생충'과 닮은 데가 있다. 둘 다 빈부격차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 강자가 약자를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의식도 비슷하다. '기생충'의 무대가 좁은 집안이었다면, '조커'는 사회로 확대되어 있을 뿐이다. 같은 해에 동양과 서양에서 만들어진 동일한 주제의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걷어차 버리고 있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걸 반대한다. 오죽하면 초등학생들마저 '이백충'이라는 말을 쓴다니 할 말이 없다. 부모의 월 소득이 이백만 원이 안 되는 가난한 아이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돈이 없다고 인간을 '버러지'로 표현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타락했다.
영화의 무대인 고담시도 비슷한 분위기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대접을 못 받을 때다. 아서의 살인은 급기야 폭동으로 발전한다. 상류층 인사들이 살해되고 거리는 불탄다. 두 계급간의 갈등은 공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에 대한 존중은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방치하면 우리 역시 영화처럼 곳곳에서 조커가 자라나면서 때를 기다릴지 모른다. 가진 자들은 성벽을 쌓을 일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 몫의 일정 부분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사람 중심의 따스한 자본주의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해 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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