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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고뿔이 찾아온 지 일주일 째다. 1년에 한두 번씩 겪어야 하는 연례행사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찬 기운을 좀 쑀다고 금방 탈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온실 속 화초처럼 바깥출입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거울 속 비실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쉰다. 머리가 띵 하고 얕은 기침, 콧물이 흐르는 감기 몸살이다. 심하면 병원이라도 가겠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니 버텨본다. 내일이면 덜해지겠지,하는 기대를 품게 하니 얄밉다. 요만한 병에도 내 일상은 깨어졌다. 독서와 블로그 글쓰기가 전혀 안 된다. 아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는 드라마에 빠지는 게 제일 낫다. 이번에 고른 드라마는 '응답하라 1988'이었다.  2015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와 ..

읽고본느낌 2024.12.30

삼한사온

전에 직장 동료였던 H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년 가량 연락이 끊어진 채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누구든지 통화를 하게 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H는 대뜸 말했다."삼한사온으로 살고 있지요."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H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시원찮았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하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온갖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주기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10여년 전부터 겪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불현듯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이삼 주 정도 지속되면서 괴롭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일상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다가 슬며..

길위의단상 2024.06.08

초여름의 짧은 산책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나고 따끔거리면서 충혈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눈곱이 잔뜩 껴서 눈을 뜨기도 힘들다. 병원에서는 눈물관막힘 증상이라고 한다. 눈물샘에서 나온 눈물은 눈을 적신 후 눈물관과 눈물주머니를 통해 코 속으로 배출되는데 그 경로가 막히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들어 심해졌다.  이 증상이 왜 바람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밖에 나가는 게 조심스럽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외출을 피한다. 의사가 고글 안경을 쓰는 게 좋다고 해서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늙으니까 이곳저곳에서 탈이 생긴다. 병원에 가면 자주 듣는 말인 '노화 현상"이다. 생명에는 직접 관계되지 않지만 일상은 불편하다. 요사이 날씨..

사진속일상 2024.06.03

가만히 햇볕 쬐기

고뿔이 들었다. 닷새 전 아침에 일어났더니 목이 꽉 잠겨서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선제 대응한다고 바로 병원에 가서 나흘치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는 약을 다 먹은 뒤에도 호전되지 않으면 코로나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이번 감기는 증상이 목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밤이 되면 기침이 통제할 수 없게 터져 나온다. 장마철 폭포수처럼 거세다. 한 바탕 난리를 치고 나야 잠잠해진다. 다행히 차도가 있어 어제부터 밤 기침은 사라졌다. 대신 약 기운이 떨어져서인지 머리가 띵 하다. 매일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다. 사뭇 집에만 있다가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밖에 나섰다. 집 주변을 가만히 걷다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쬤다. 햇볕이 보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 보았다면 영낙없이 곧 죽어갈 듯한 노인네 꼬락..

사진속일상 2024.05.22

앓던 이가 빠지다

열 달 전부터 앞니 하나가 시큼거렸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정도여서 치과에 가지 않고 버티며 지냈다.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저절로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때는 잊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에 조상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음복을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말썽을 부리던 앞니가 끝을 맞은 것이다. 손가락으로 당기니 쑥 하고 빠져나왔다. 저절로 수명을 다하며 자연사한 셈이었다. 이 정도 되기까지 참고 견뎠으니 어지간히 미련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진즉에 병원에 갔다면 빠른 조치가 가능하고 고생도 덜 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워낙 게으르고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병원에 간들 뽑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테니 약..

길위의단상 2024.02.13

그럭저럭과 그러려니

'그럭저럭'과 '그러려니'는 늙어가면서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말이다. 가끔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서로 묻는다. 이때 내 대답은 일정하다. "그럭저럭 지내지 뭐." 늙어서의 일상이란 게 그렇다. 잘 지낸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지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그럭저럭'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반면에 '그러려니'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늙으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을 안팎으로 자주 만난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성에 차지 않고, 몸도 이곳저곳이 고장 난다.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니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여러 달째 손가락과 이빨이 말썽이다. 어느 때부터 양 손의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기 시작했다. 아..

참살이의꿈 2023.11.24

닷새만에 회복하다

지난주에 무리를 했던 것 같다. 세 번의 모임이 있었고, 연이어 고향에 내려가 산소 일을 했다. 그 뒤부터 목이 따끔거리며 몸살기가 나타났다. 두통이 동반되고 콧물도 나왔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에어컨이 문제였다. 특히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냉기가 심했다. 늘 갖고 다니던 팔 토시가 그때는 없어서 에어컨의 찬 바람에 오래 노출되었다. 여기에 피로가 겹치니 몸살감기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는 자가 진단이다. 한 달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분이 이웃에 있다. 나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빨리 가라앉고 있다. 몸살이 시작되면 증세가 심해지다가 사나흘 뒤 정점을 찍고 서서히 사라진다. 내 경우는 통상 두 주 정도는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 단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길위의단상 2023.09.15

병원에 안 가려는 이유

일주일 전부터 오돌토돌한 붉은 반점이 팔에 돋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퍼지더니 사흘째에는 다리에도 나타났다. 원인은 모르지만 두드러기인 것 같다. 우선 보기에 엄청 징그럽다. 다행히 간지러움은 심하지 않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면 금방 낫겠지만 그냥 견디기로 한다. 며칠 더 고생하고 병원 신세를 안 지는 쪽을 나는 선택한다. 한 달 전에는 앞니 하나에 이상이 생겼다. 건드리면 아파서 양치질도 피해서 했다. 음식 먹는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치과에 가는 대신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지나니 통증이 가라앉고 많이 진정되었다. 지금도 정상이 아니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아마 치과에 갔다면 깔끔하게 임플란트를 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이빨로 가능하면 버틸 수 있는..

참살이의꿈 2023.07.04

코로나 후유증일까

작년 8월에 코로나에 걸렸다. 열흘 동안 격리 생활을 한 후 두 주쯤 지나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사나흘째 되는 날부터 증상(열과 기침)이 심해져서 그 뒤 닷새 정도가 힘들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수월하게 통과한 셈이었다. 코로나 뒤에는 쉽게 피로해지면서 식욕 부진이 따라왔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왼쪽 머리와 안면에 희미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굳어진 느낌이랄까, 마치 창호지를 얼굴에 붙여 놓은 듯 감각이 무뎌졌다. 손으로 만지면 다른 사람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몸 컨디션에 따라 심하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다. 일상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신경을 끄고 지냈다. 이런 증세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으니 어느덧 아홉 달째다. 있는 듯 아닌 듯 미약해서 잊고 사는 때가 ..

길위의단상 2023.06.11

산 대로 죽는다

"엄마의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즉 엄마가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박희병 선생이 어머니의 마지막 1년을 옆에서 간병하며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의 에필로그에 적혀 있다. 선생의 어머니는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장애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태도가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인식한다. 다른 동물은 현재만 살뿐 ..

참살이의꿈 2023.01.12

조심스레 산책하다

허리가 결린 지 일주일째다. 차도가 아주 느리다. 어제는 밖으로 나가 마을 주변을 조심스레 산책했다. 올해 후반부는 너무 어렵게 시작된다. 8월에는 코로나로 두 주일, 9월 지금에는 허리 통증으로 한 주일 넘게 힘들어하고 있다. 연례행사로 잊지 않고 날 찾아오는 병이 셋 있다. 감기, 허리 결림, 어지럼증이다. 셋의 공통점은 예고도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번 허리 결림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전 아침에 일어났더니 허리가 뻐근하며 몸을 제대로 굴신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꿈을 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심하게 뒤척이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었다. 얼마 전의 꿈에서는 상대와 싸우다가 실제로 발차기를 하는 바람에 침대에 부딪힌 소리에 놀라 아내가 달려오는 소동이 있었다. 감기..

사진속일상 2022.09.15

코로나에 걸리다

코로나에 걸린 누적 확진자가 2천만 명이 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더하면 국민의 반 이상이 코로나에 걸린 셈이다. 주변을 봐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 비율이 반이 넘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는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만남이 되어 가고 있다. 나도 이번에 코로나에 걸렸다.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리며 지냈지만 한 순간의 방심에 무너졌다. 지난주 목요일에 서울에 가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개차반이 되었다. 온갖 추태를 부리다 집에 들어왔으니 코로나가 가만 뒀을 리 없었다. 다다음날부터 기침이 나면서 증상이 나타났다. 나의 '코로나 일기'다. - 첫째 날(8/6) 오후부터 몸이 나른하고 목이 칼칼하면서 잔기침이 나다. 에어컨 바람 탓인 줄 알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다. 딸과 손녀들이 찾아왔지만 혹시나..

길위의단상 2022.08.12

남들처럼

"은주야, 이제 너 좋아하는 배구장 가서 공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로 산으로 가서 맑은 공기 시원하게 마셔. 다음 생애엔 언니랑 남들처럼 4500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산책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랑 튀김도 사 먹자. 남들처럼 손 잡고 여행도 떠나고, 너 좋아하는 노래방도 가자. 남들처럼, 남들처럼." 지난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였던 안은주씨가 사망했을 때 언니가 오열하며 한 말이다. 안은주씨는 2011년에 발병하여 12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배구 선수 출신이었던 안은주씨는 누구보다 건강했다고 한다. 안은주씨는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1774번째 사망자였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기업의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가해자들은 1심에서 무죄를..

길위의단상 2022.05.30

까불지 마라

그저께 아침에 일어나는데 휘청했다. 천정과 창문이 빙빙 돌면서 놀이기구에 탄 것 같이 어지러웠다. 다시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한참 있으니 진정되었다. 어지럼증이 처음 나타난 건 8년 전이었다. 에버랜드에서 롤러코스터 등 신나는 놀이기구를 타며 젊은이 흉내를 내다가 식겁했다. 기구에서 내렸는데도 세상이 핑핑 돌며 멀미가 났다. 겨우 집에까지 운전을 하긴 했으나 몇 주 동안 어지럼이 사라지지 않아 혼이 났다. 그 뒤로도 일 년에 두세 차례는 어지럼증이 나타나 몇 주씩 괴롭히다가는 사라지는 게 반복되었다. 병원에 가서 뇌 CT를 찍었으나 이상은 없었다. 결국 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다행히 주기적으로는 나타나던 어지럼증은 3년 전쯤부터 소식이 끊겼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비슷한..

참살이의꿈 2022.05.18

조심과 방심 사이

발바닥에 이상이 느껴진 게 3년 전이었다. 많이 걸으면 따끔거리며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심하지는 않으니 우선 걷는 걸 자제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긴 거리의 트레킹이나 등산을 쉬게 되었고, 집에서는 쿠션이 넉넉한 슬리퍼를 신었다. 조신하고 몇 달을 보냈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작년까지 집 부근에 있는 낮은 산에만 드문드문 다녔지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았다. 제일 높이 올랐던 게 600m급의 파주에 있는 감악산이었다. 그 정도면 거뜬해서 발은 다 나았다고 판단하고 몇 달 전부터 등산을 재개했다. 아직 높은 산은 아니지만 - 발보다도 이제는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어 -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올랐다. 산에 드는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북한산 숨은벽에 다녀왔는데 다시..

길위의단상 2022.05.13

한 장의 사진(32)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분기점을 통과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험난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봉우리인지는 넘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지나온 길을 멀리서 조망하게 될 때 삶의 매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능선길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볼 때 지나온 산봉우리들의 모양과 높이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몇 차례 파고가 밀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30대 중반에 경험했던 디스크 수술이었다. 아마 1986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 불릴 만큼 - 그 시절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허리를 절개하고 칼로 디스크를 잘라내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던 때였다.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도..

길위의단상 2022.04.18

늙어서 그래요

대상포진을 맞이한 지 50일이 지났다. 이제야 종착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얼굴에 난 포진은 3주 정도 지나니 아물었지만 가려움증의 여진은 계속이다. 개미 한 마리가 멋대로 내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다. 대상포진은 뒤끝이 사나운 질병이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끈질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내 발로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요." (젊은 의사는 "노화 탓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늙어서 그래요. 시간이 약이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세요.") 서운했으나 의사 말이 틀리지 않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년이 되니 이상이 생긴 뒤의..

길위의단상 2021.06.05

힘겨운 5월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지만 나에게 올 5월은 너무 힘겨운 달이다. 많이 지치고 심신이 녹초가 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꽃구경하러 바깥나들이 한 번 나가지 못했다. 제일 괴롭히는 건 7주째 계속되는 대상포진이다. 포진은 가라앉았으나 아직도 개미 한 마리가 얼굴을 기어다니고 있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 밑에서 입술까지 흉터가 띠 모양으로 나 있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지만 원래 상태로 돌아갈지 의문이다. 이달 중반에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이 생겼다. 그 탓으로 위장에 탈이 났다. 속이 부글거리고 소화가 안 되니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마음의 평형이 깨지면 내 위장은 즉각 반응한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외부 충격에 약한..

사진속일상 2021.05.29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요즘은 혼자만 있을 때가 잦아졌다 나 홀로 느긋하게 온갖 생각의 안팎을 떠돈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보거나 내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가 잦다 빈 집에서 빈 방 가득 생각들을 풀어내다 거둬들이다 하면서 나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좋아졌다 혼자 마신 술에 젖어 술이 나를 열어주는 길을 따라 나 홀로 유유자적 거닐 때가 좋다 적막이 적막을 껴입고 또 껴입으면 혼자 그 적막을 지그시 눌러 앉히곤 한다 눌러 앉혀 다독이면 그윽하게 따뜻해지는 적막이 좋다 나 홀로,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대상포진 걸린 지가 세 주가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포진이 생긴 얼굴은 전류가 흐르는 듯 지릿지릿하다. 마치 폭격을 당한 느낌이라 '포진'의 '포(疱)'가 나에게는 '포(砲)'로 읽힌다. 근 한 ..

시읽는기쁨 2021.05.11

+5kg

보름 동안에 몸무게가 5kg이 늘었다. 대상포진이 준 선물이다. 이번 대상포진은 특이한 게 엄청나게 허기가 지고 엄청나게 잠이 왔다. 걸신들린 듯 먹었고, 낮밤 없이 잠을 잤다. 그 결과 몸무게가 최고치를 찍었다. 대상포진 전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식(小食)이었다. 아침에 누룽지죽, 점심은 밥 반 공기 정도, 저녁은 야채주스 한 잔이 고작이었다. 그게 속이 편하고 좋았다. 육체 활동이 많지 않으니 그 정도 음식이면 넉넉하다고 믿었다. 몸도 가뿐하고 좋았다. 그런데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크게 피곤한 일도 없었는데 대상포진에 걸리고 면역력이 약해진 것은 평소 식사량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한다. 아내를 비롯해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상포진에 걸리니 몸이 마구 음식을 ..

길위의단상 2021.05.06

대상포진 경과

여섯째 날 일어나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특히 눈두덩과 입술 부분이 심하다. 물집은 계속 생겼다 터졌다를 반복한다. 다행히 통증은 약해서 견딜만하다. 진료는 내일이지만 주사라도 미리 맞으려고 병원을 찾았다가 휴원일이라 헛걸음하다. 대상포진 이놈 만만찮다. 일곱째 날 어제저녁 8시에 침대에 들어가서 오늘 아침 8시에 일어났으니 무려 12시간을 잔 셈이다. 얼굴 부기는 여전하고 두통이 다시 나타난다. 두통은 어젯밤에 너무 길게 누워 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 병원 진료받다. 얼굴과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오다. 의사는 대상포진 증세가 이제 정점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여덟째 날 대상포진에 걸린 이후로 식욕이 엄청 왕성하다. 평상시의 너댓 배는 먹는 것 같다. 아내는 먹을거리를 계속 사 온다..

길위의단상 2021.04.28

대상포진이어서 다행이다

첫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했다. 어제 밖에서 마신 술 탓이라 여겼다. 당구를 치고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약간의 취기가 있었을 뿐 과하지는 않았다. 제일 먼저 코로나가 걱정되었다. 집에 손주도 와 있었다. 만약 코로나라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다. 둘째 날 머리 띵한 정도는 더 심해졌다. 얼굴 왼쪽 부분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얼굴로 자꾸 손이 갔다. 흔한 감기 몸살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중풍의 전조증상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중풍이 오면 몸의 반쪽이 마비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보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다행히 손주는 오전에 떠났다. 다시 타이레놀과 쌍화탕을..

길위의단상 2021.04.21

한밤중의 전화벨 소리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무섭다. 누구나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잠잘 시간에 전화를 걸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밤에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화면을 보니 동생 이름이 떴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입원하셨다는 연락이었다. 다음 날 내려가서 닷새 동안 병실 지킴이를 했다. 다행히 심각한 병은 아니어서 일주일 정도의 입원으로 퇴원이 가능했다. 어머니는 아흔이 되실 때까지 한 번도 입원해서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을 정도로 강건하신 분이다. 퇴원 날짜를 받아 놓고 나는 농담 삼아 말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입원해 보는 경험도 했으니 감사하세요." 2인실에 있었는데 막바지에 옆 침대에 천하무적 환자가 들어왔다. 80대 할머니였는데 호통을 치면 간호사들이 꼼짝 못 했..

사진속일상 2020.09.26

바이러스의 습격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향후 미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3대 요소로 식량 부족, 기후 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전염병 유행은 하찮게 생각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정도는 충분히 방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사태로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전염력이나 치명률이 높은 변종이 나타나면 문명만 아니라 인류 생존마저 위협 받을 수 있다.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코로나19가 보여주고 있다. 은 바이러스 전문가인 최강석 선생이 쓴 바이러스에 대한 안내서다. 중고등학생이면 넉넉히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쓴 책이다. 책에서는 1918년 스페인 독감부터 2002년의 사스, 2009년의 신종플루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

읽고본느낌 2020.07.05

코로나 이후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 무성하다. 심지어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역사를 구분하자는 얘기도 한다. 과연 그 정도일까? 코로나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궁금한 문제다. 과연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이 생길까? 인류가 개과천선해서 더 나은 대안적 삶을 찾을까? 이 정도가 아니라면 코로나로 세상이 바뀐다고 큰소리를 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지 회의적이다. 코로나19가 올해 안에 진정되고 경제 회복이 이루어지면 코로나19는 표피에 상처에 남긴 채 사라질 수 있다. 다만 코로나19가 수년간 지속하며 우리를 괴롭히거나,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

참살이의꿈 2020.04.19

텅 비었다

하필 이 시국에 이빨이 고장 났다. 진통제로 버티지만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프다.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이상이 나타난 건 서너 달 전이었다. 딱딱한 걸 씹으면 통증이 오는 정도였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전에 다른 이빨도 그런 식으로 몇 달 참았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병원에 가지 않은 채 나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나흘 전에 갑자기 통증이 찾아왔다. 아프면 어느 부위나 고통을 주지만 치통도 만만치 않다. 심해졌다 약해졌다 주기적으로 괴롭힌다. 죽으로 연명하면서 음식물 온도도 잘 맞춰야 한다. 조금만 뜨겁거나 차가워도 안 된다. 인상 쓰면서 밥을 먹어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단골 치과는 상가 건물 3..

길위의단상 2020.03.10

자방 격리

살짝 몸살기가 찾아왔다. 사흘 전에 물빛공원을 걸을 때 찬 바람이 불어서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콧물이 흘렀고, 몇 번 재채기도 나왔다. 그 뒤로 머리가 띵 하며 몸이 나른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환절기 연례행사를 치러야 하나 보다.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된 손주가 집에 와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가 격리보다 더 센 자방(自房) 격리 중이다. 만에 하나 코로나19라면 큰일 날 일이니 문 닫고 방안에 갇혀 있다. 덩달아 치통까지 찾아와 요사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산다. 몸살기라도 사라져야 치과를 갈 텐데, 그저 진통제를 먹으며 버틸 수밖에 없다. 이런 시기에는 몸이 아프면 더더욱 안 된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은 기세가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한창때 수천 명씩 나오던 확진자 수가 지금은 백 단위로 줄..

길위의단상 2020.03.06

감기 불청객

몸이 부실해서 한 해에 두 번은 감기에 걸린다. 주로 가을에서 봄 사이에 찾아온다. 올 초겨울에는 독감에 걸려서 한 달 정도 고생했다. 그 뒤 봄에 또 한 번 감기에 걸렸고, 이번 가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부러 무리한 일을 피하고 조심하는 데도 불청객은 어김없다. 며칠 전 사위와 밖에 나가 당구를 치고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밤거리를 걸은 게 전부였다. 다음 날 기력이 빠진 걸 느꼈지만 설마 감기에게 틈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를 가지고 콜록거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매일 감기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프면 절실히 느낀다. 몸 튼튼한 사람이 제일 부럽다. 나는 선천적인 약골이다. 무리하면 어떤 후유증이 오는지 잘 안다. 그래서 조심하는 편인데 모르는 사람들은 엄살을 부린다고 말..

길위의단상 2019.11.18

새벽꿈

산속에서 혼자 사는 초등 동기 S에게 놀러 갔다(실제로 S는 소백산 깊은 곳에 살고 있다). 황토로 직접 지은 단칸방의 집인데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되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귀곡산장처럼 으스스했다.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밖에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며 찾으시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외면했지만 너무 간절하게 부르셔서 문을 열고 나갔다. 하얀 소복을 입은 외할머니가, 여기는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자고 하셨다. 안 그래도 꺼림칙하던 차에 외할머니를 따라가리라 마음먹고, 방으로 들어가 S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S는 정색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모두 잠가버렸다. 졸지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밖에서는 S가 외할머니를 해치는 소리가 들리고..

길위의단상 2019.04.10

60.4kg

몸무게가 지금 같이 떨어진 것은 기억에 닿는 한 전에는 없던 일이다. 오늘 아침에 체중계에 올라갔더니 60.4kg이 나왔다. 작년 이맘때 66kg이 넘었으니 6kg이나 빠진 셈이다. 겨울에는 활동량이 줄어드니 보통 몸무게가 늘어난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반대다. 속병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다. 소화가 안 되니 소식을 해야 하고, 기름진 음식은 먹지 못한다. 살이 안 빠질 수가 없다. 먹는 양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빠져야 하는 게 맞다. 소화불량과 부글거림 증상이 이렇게 오래 가는 건 처음이다. 늙은이는 한 번 탈이 나면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다. 우선 몸이 가벼워서 경쾌하다. 65kg이 넘으면 둔하다. 느낌으로는 내 적정 체중이 61kg 내외인 것 같다. 나..

길위의단상 201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