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39

토지(19, 20)

20권 읽기를 마쳤다. 작년 12월 초순에 시작했으니 넉 달 정도 걸린 셈이다. 통영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을 찾았을 때 읽기를 결심했고, 다 읽은 뒤에는 하동 박경리 문학관에서 마무리했다. 소설 후반부는 일제강점기 말의 가혹한 탄압을 견뎌내야 하는 민초들의 삶이 그려진다. 영웅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 이 강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의 고군분투하는 삶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땅의 현실을 이만큼 구체적으로 기술한 소설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작가는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25년이 지난 1994년에 이 소설을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최참판댁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사회제도와 신분질서의 해체를 다루는 1부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나중에 일제강점기 전체를 다루는 5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문학계에 대단..

읽고본느낌 2025.04.06

토지(17, 18)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에 도전하지만 전세는 기울어진다.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인 강제 징용과 징병제를 실시한다. 요주의인물에 대한 예비검속령으로 김길상, 서의돈, 유인성, 선우신 등이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숨 죽이며 사태를 관망한다. 일제의 패망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쭉 그래 왔지만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방관자로 살아간다. 민족의식을 가진 지사들은 대부분 시대의 제물이 되어 망가진다. 17, 18권에 나오는 여옥과 명빈이 대표적이다. 둘은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폐인이 될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몸이 점차 회복된다.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인물은 2, 3세대가 주역이 된다. 자주 나..

읽고본느낌 2025.03.21

토지(16)

16권은 신경에서 생활하는 홍이 1940년 8월 1일자 신문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권의 시대 배경은 1940년대 초반으로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며 민족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때다. 길상의 손자 돌잔치 장면을 그린 대목에서 당시의 암담한 시대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 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복 국민복으로 갈아입..

읽고본느낌 2025.03.12

토지(15)

15권은 4부의 마지막 권이다.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 후반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어 남경 학살이 벌어지면서 세계대전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시기다. 국내 정세도 전시 분위기로 바뀌면서 폭압이 심해진다. 그와 함께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조선인들의 고투도 이어진다. 고향에 내려온 길상은 은인자중하며 지낸다. 서희와 두 아들이 있기에 함부로 앞장설 수도 없다. 이 시기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이 있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인 배화(排華) 폭동이 일어났다. 만주에서 일어난 중국과 조선 농민의 충돌을 조선일보가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국내에서 화교를 습격하고 학살하는 만행이 일어난 것이다. 일제의 농간에 놀아난 참극이었다. 군중들이 얼마나 쉽게 사악한 정치 세력들에 ..

읽고본느낌 2025.03.05

토지(13, 14)

4부의 시작인 이 두 권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고착화되면서 지식인들은 좌절하고 패배 감정에 젖게 되는 시기다. 처세를 위해 친일에 영합하는 부류도 많이 생겨나고, 민중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13권의 서두에서는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을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타파를 외치고 민족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 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 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 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히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

읽고본느낌 2025.02.23

최선의 삶

이런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도 있구나,라고 가슴 아프게 읽었다. 범생이로 보낸 나로서는 전혀 다른 세상을 대하는 충격이 컸다. 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생 때 가출하고 고등학교는 중퇴해서 24세 때 한예종에 들어간 작가의 이력이 소설의 구성과 비슷하다. 임솔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작가가 방황하던 16살 때부터 10년간 써 온 소설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놓지 못한 것은 글로 드러냄으로써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가가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기를 바란다. 소설은 강이, 아람, 소영 세 소녀의 심한 성장통에 시달린 중고등 시절 이야기다. 강이는 뚜렷한 이유 없이 친구 따라 가출해서 험..

읽고본느낌 2025.02.14

토지(11, 12)

11, 12권은 3부 후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환과 봉순이의 안타까운 죽음이 나온다. 동학군의 장수였던 김개주의 숨은 아들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환의 죽음은 너무 뜻밖이고 허무하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환의 죽음은 그동안 숨어 버티던 동학 운동의 몰락이었다.  박복하고 가련한 여인인 봉순 역시 섬진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제 마음만 잘 다스렸으면 딸을 키우며 그런대로 남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련만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던 것 같다. 뭇 수컷들이 기생을 노리개로 여기며 데리고 놀다가 버렸다. 그나마 마지막에 서희가 봉순이를 챙겨주는 마음이 따스했다. 길상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서희가 하동에서 경성을 오가며 면회를 ..

읽고본느낌 2025.02.08

토지(9, 10)

9, 10권은 3부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서희가 간도에서 돌아온 뒤인 1920년대 이야기로 경성, 진주, 하동, 만주 등이 무대다. 신분 질서가 붕괴되며 양반과 상민 사이의 결혼이 나타는 시대다. 서희와 길상의 뒤를 이어 홍이와 허보연이 두 집안의 마찰을 이겨내고 결혼한다. 관수는 백정의 사위가 되어 형평운동을 주도한다. 3.1만세 뒤 민족의 미래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다양한 분파가 생겨난다. 환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이어가는 동학 후예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임정과 공산당 조직이 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모습도 자주 나온다. 이상현처럼 시대의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서의돈 같은 사회주의 그룹이 있고, 민족자본을 육성해서 일본에 대항하려는 일군도 있다. 어쨌든..

읽고본느낌 2025.01.31

다읽(22) - 좁은 문

20대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작품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다. 기존의 가르침이나 규범을 타파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젊은 가슴에 울림을 줬다. 좋은 문장들은 노트에 필사하며 정독했던 기억이 난다. '나타나엘이여'로 시작하는 싱싱한 문장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반면에 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제목으로 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여겼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뭐, 사랑 이야기네"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이제 다시 읽어 본 은 젊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지드가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보인다. 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지 않나 싶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외사촌간인 제롬과 ..

읽고본느낌 2025.01.23

토지(8)

8권은 2부의 마지막이다. 용정 생활을 마치고 10여 년 만에 서희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공 노인의 도움으로 조준구한테 빼앗긴 땅을 되찾고 귀향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인 길상은 서희와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고, 우국지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연해주에 남는다. 이 권에서 월선이 죽는다. 월선은 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다. 일편단심 한 남자를 사모하면서 갖은 고난을 겪다가 암에 걸려 죽게 된다. 대척점에 물욕으로 가득찬 임이네가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용이도 속깨나 끓였으리라. 산판 일을 마치고 열 달 만에 돌아온 용이 월선의 마지막을 지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8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읽고본느낌 2025.01.21

아주 편안한 죽음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입원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묻는다. 70대 후반이었던 작가의 어머니는 대퇴부골절로 입원해서 암 진단을 받고 두 달가량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강인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자연히 보부아르와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으로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모녀간의 유대감을 확인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드러냄으로써 어머니를 애도하면서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책 중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 환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

읽고본느낌 2025.01.15

토지(6, 7)

6권과 7권은 하동, 용정, 경성을 무대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다. 일제에 빌붙어 약삭빠른 처신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뿌리 없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향에서 쫓겨나 연해주나 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다행이랄까 서희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돈을 모으고 용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일본과 척을 지지 않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준구에게 복수하려는 일념 때문이다. 7권 끝에는 공 노인을 통해 조준구에게 옛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은밀한 복수 작업이 시작된다. 두 권에는 의병 및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펼쳐진다. 주로 옛 동학교도들이 모여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중심인물은 환, ..

읽고본느낌 2025.01.12

토지(3, 4, 5)

4권에서 1부가 끝나고, 5권부터는 2부가 시작된다. 1부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일강제병합이 되는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최참판댁은 몰락하고 마을 사람들과 간도로 이주하면서 1부는 끝난다.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은 조준구에 의해 서희는 집과 땅을 빼앗긴다. 젊은이들은 의병이 되어 마을을 떠나고 전염병과 흉작으로 평사리는 쑥대밭이 된다. 를 통해 1900년대 초의 나라 상황과 민초들의 삶을 그림으로 보듯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서희가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잠재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서희의 성격 묘사 중에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하다'는 표현이 이색적이었다. 2부는 2011년의 용정 마을 대화재로 시작한다. 불은 시가의..

읽고본느낌 2025.01.04

소년이 온다

지난 10일에 스톡홀름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국내 정세가 급박하여 관심을 덜 받고 지나갔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장면은 감격이었다. 시상식 전후로 수상 소감과 강연도 있었다. 최근에 작가의 를 읽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작가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문체로 애절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더 슬펐는지 모른다. 잔인한 폭력과 고통,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국가 폭력은 쉬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책에 나오는 대로 폭력에 노출된 인간은 방사능 피폭처럼 오랜 기간 인간성을 파괴한다. 광주는 수없이 되태어나고 인간을 살해한다. 작금에 윤석열에 의해 저질러진 비상계엄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에 나오는 인상적인..

읽고본느낌 2024.12.13

토지(2)

올 겨울에는 박경리 작가의 를 읽으려 한다.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한 5부작, 20권으로 된 대하소설이다. 처음 나왔을 때 1부까지 읽고 나머지는 뒤로 미루어뒀는데 이제야 완결 지으려고 한다. 지난달 통영에 있는 박경리기념관에 갔을 때 한 결심이다. 전집을 사서 읽을까, 도서관에서 빌려 볼까, 고민했는데 후자를 택했다. 도서관에는 다산책방에서 나온 20권 전집이 있다. 그런데 서가에 1권만 빈 채로 있어서 2권부터 시작한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한 번 읽은 적이 있으니 큰 지장은 없을 듯하다. 그렇지만 눈에 익은 등장인물은 최치수, 서희, 길상 정도다. 40년도 더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2권에서는 최치수의 죽음과 함께 최참판 댁의 몰락이 시작된다. 1890년대 후..

읽고본느낌 2024.12.12

한강 작가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작가의 '시적 산문'을 한 이유로 꼽았다. 시적 산문이라는 특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작품 이 아닐까 싶다. 은 2016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과연 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이기보다는 시 같고 수필 같은 작품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플롯도 분명하지 않다. 기존 소설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거부감도 들지 않은, 제목대로 하얀 도화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이다. 마침 첫눈이 내리는 날 이 소설을 읽었다. 눈을 떼고 창밖을 보면 하얀 눈이 대지를 소복하게 덮고 있었다. 책과 잘 어울리는 날씨였다. 은 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지낼 때 쓴 소설이다. 2차세계대전 때 폐허가 되었던 도시의 흔적을 보며 작가..

읽고본느낌 2024.12.01

다윈 영의 악의 기원

3권으로 된 박지리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무대는 1지구부터 9지구까지 철저하게 신분으로 갈라진 세계다. 각 지구간에는 제한된 왕래만 가능하고 서로를 침범할 수 없다. 1지구는 온갖 혜택을 누리는 파라다이스지만, 9지구 주민은 겨우 생존해 나가는 폐허가 된 세계다. 신분이 세습되는 가상의 세계지만 이미 계급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구조라고 누구나 느낄 것이다. 1지구에는 최고의 엘리트만 갈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이 있다. 주인공인 다윈 영은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학생이고, 아버지 니스는 문교부 차관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소설에는 니스, 버즈, 제이의 세 친구가 나오고 후대로 이어진 친분은 십대인 다윈, 레오, 루미의 얽힌 관계를 틀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30년 전에 살해된 제이..

읽고본느낌 2024.10.08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일곱 권의 작품을 남기고 요절한 은둔 작가였다는 프로필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작인 은 다음에 읽어보기로 하고 남겨둔다. 작가는 문학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두 작품이 주는 신선한 느낌이 좋았다. 작가의 첫 작품은 인데 2010년에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심심풀이로 썼다는데 수상을 하고 주목을 받은 걸 보면 타고난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은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가정폭력의 희생자면서 가해자가 된 사연을 아프게 그려낸 소설이다. 소방관인 아버지는 가정을 지옥으로 만드는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무기력해서 아무 대응을 못하고 누나와 주인공은 둘 만의 피난처인 맨홀 속으로 도망..

읽고본느낌 2024.09.20

오리엔트 특급 살인

무더운 여름을 지내는 데는 추리 소설 읽기도 한 방법이다. 몰입도가 추리 소설 만한 게 없다. 또는 무협지도 괜찮다. 젊었을 때는 무협지를 옆에 쌓아두고 여름을 나기도 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추리 소설 한 권을 골라 보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은 워낙 유명한 데도 책으로는 읽어보지 못했다. 오래전에 영화로 본 기억은 난다. 대체적인 내용을 알기에 흥미가 반감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특히 반전이 들어 있는 결말은 처음 대하는 듯 놀라웠다. 왜 애거서 크리스티를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 하는지 알 만했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폭설 속에서 고립되고 객실에서 한 사람이 칼에 찔린 채 발견된다. 마침 열차에는 푸아로 탐정이 타고 있었는데 예리한 관찰과 분석으로 사건에 얽힌 비밀을 풀..

읽고본느낌 2024.08.10

바깥은 여름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이다. '입동'을 비롯해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보통은 수록된 작품 중에서 대표작을 책 제목으로 삼는데 이 책은 다르다. '바깥은 여름'은 여기 실린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이번에도 김애란 작가의 통통 튀는 경쾌한 표현들에 여러 차례 감탄했다. 하지만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 삶의 애환과 쓸쓸함이다. '여름'은 만물이 생기를 띄고 번성하는 계절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겨울처럼 스산하고 춥다. 소외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첫 작품인 '입동'은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어렵사리 집을 장만하고 행복해지려는 때에 후진하는 유치원 차에 치여 아들이 숨진다. 그 뒤부터 부부의 삶은..

읽고본느낌 2024.08.06

세 여자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소설이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세 여자(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남성 중심의 운동사에만 익숙한 우리 눈에 이런 여성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슷한 또래의 세 여자는 20대 초반에 만나 운명적으로 얽힌다. 셋 중에서도 제일 주도적인 인물은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중국 상하이 유학중에 박헌영, 주세죽, 임원근, 김단야 등과 만나 사회주의연구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한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일본, 중국, 미국,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인텔리였다. 또한 임원근을 비롯해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20..

읽고본느낌 2024.08.03

바늘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읽은 천운영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바늘'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20여 년 전에 쓰인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특이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여성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인물이어서 충격을 받는다. 소설에 나오는 그들은 못 생긴데다 폭력적인 야수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여성은 예쁘고 우아하다는 기존의 사고 틀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가부장제하에서 구축된 모성이나 여성성의 허구를 작가는 깨부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전부 육식을 탐한다. 이런 동물적인 피의 욕구는 외부세계에 대한그들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행복고물상'에 나오는 여자는 남편을 상습적으로 매질한다. "아내는 야생의 초원을 가졌다..

읽고본느낌 2024.07.21

너의 목소리가 들려

지금은 뜸해졌지만 한때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벌이는 대폭주는 규모가 엄청났고 시민들에게 주는 피해도 컸다. 저게 무슨 짓거리냐,가 대부분의 반응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경찰력으로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걸 원망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들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는 폭주를 감행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을 그들의 시선에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가출 청소년의 어두운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이런 삶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어두운 뒷골목이나 지하의 사연을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제이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의 아이들과 지..

읽고본느낌 2024.06.17

침이 고인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침이 고인다'를 비롯해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전반부에 실린 소설은 밀도가 높고 뛰어나지만, 후반부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작가는 주로 도시 변방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것 같다. 잘 보이지 않는, 외면하고픈 아픈 현실을 위트 넘치는 문제로 보여준다. 일상은 고달프고 비루하지만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밟혀도 꿋꿋이 견뎌내고 일어서는 길 위의 잡초처럼 살아내는 숫한 청춘들이 있다. '침이 고인다'에서는 학원 강사로 일하는 그녀가 사는 원룸에 더 가난한 후배가 찾아온다. 그날 밤 그녀는 후배의 얘기를 들으며 같이 지내기로 결심한다. 후배가 그녀에게 들려준 얘기는 어떻게 부모에게 버림받았는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읽고본느낌 2024.06.06

엄마를 부탁해

삐딱이 성질 때문이겠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작품은 부러 멀리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천만 관객의 영화라든지 베스트셀러 책 같은 것은 접하지 않은 게 더 많다. 대신에 알려지지 않고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애써 찾아본다. 그런 작품 중에 알짜배기가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2008년에 나온 신경숙의 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대중들이 환호하니까 일부러 읽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번에 신 작가의 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가 소환되었다.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2011년 판인데 무려 197쇄를 찍고 있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책을 16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작품성으로 따지자면 보다는 가 더 나아 보인다. 부모를 향한 애틋한 감정과 독자들이 받는 공감은 비슷..

읽고본느낌 2024.05.31

아버지에게 갔었어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어느 외국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한국의 시골 사람들은 오직 친척들에게 잘 하고 자식을 부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것을 삶의 전부로 안다." 신경숙 작가가 그리는 아버지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미덕일 수도 있고,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의 한계일 수도 있다. 마침 정읍 깻다리 마을 출신의 지인이 있어서 신경숙 작가와 가정에 대해 짧게나마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소설에 묘사된 아버지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물었더니 미소로 대신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객관성을 따지는 것이 우문인지 모르겠다. 형제라도 부모에 대한 기억과 인상이 달라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의 후반부에도 작가 외에..

읽고본느낌 2024.05.15

밀크맨

힘들게 읽은 책이다. 책 자체가 가독성이 떨어지는 데다 눈병까지 나서 읽는데 애를 먹었다. 눈이 아파서 몇 페이지를 못 넘기고 책을 자주 덮었다. 그래도 2018년 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화제작이라고 해서 속독이긴 하지만 끝까지 읽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애나 번스(Anna Burns)가 쓴 은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가 무대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신구교의 종교 갈등에 반정부 투쟁이 겹쳐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비정상적인 환경에 놓여 있었다. 소설은 18살의 여주인공인 '나'가 이런 관습과 규범의 사슬 속에서 스토킹까지 당하면서 겪는 내면의 고통을 줄곧 일인칭 화법으로 풀어낸다. 소설에는 사람들 이름이나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나'의 남자친구는 '어쩌면-남자친구'이고 '아무개 아들'하는 식이다. 지역 이름..

읽고본느낌 2024.05.07

반에 반의 반

가끔 여자가 되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여자의 속성이 부러워서라기보다 여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다. 여자가 바라보는 남성, 여자가 바라보는 가족, 여자가 바라보는 생명 등은 남자의 관점과는 다를 것 같다. 우리는 이성(異性)과 섞여 살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상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천운영 작가의 소설 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작의 형식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사연들을 담고 있다. 딸조차도 어머니를 오해하는데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남성은 체화한 인습과 관념의 색안경을 끼고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읽고본느낌 2024.04.22

그리고 봄

조선희 작가의 따끈따끈한 소설이다. 소설의 무대가 2022년으로 작금의 정치 상황을 앓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당선되었고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집단우울증에 빠졌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TV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희와 영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딸 하민은 3번을 찍었고, 아들 동민은 소위 '2찍'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부부니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은 이런 부모 자식간의 갈등에 더해 청년 세대의 진로와 취향, 퇴직 후의 생활 등의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를 경쾌한 필치로 다룬다. 정희는 기자 출신의 엘리트 엄마이고, 영한은 은퇴한 전직 교수다. 하민은 커밍 아웃하고 동성 연인과 함께 독일로 떠났고, 동민은..

읽고본느낌 2024.03.16

코마

로빈 쿡의 의학 스릴러 소설이다. 읽다 보니 기시감이 드는 내용인데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라 예전에 접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책이 아니라면 영화를 봤을 수도 있다. 어쨌든 흥미롭게 읽었다. 뇌 기능이 정지돤 혼수상태를 '코마(coma)'라고 한다. 총명한 의대생인 수잔 윌러가 보스턴 메모리얼 병원에 연수를 갔다가 코마에 빠진 환자를 보면서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과 동갑인 젊은 처녀가 자궁 이상 출혈로 소파 수술을 받다가 갑자기 코마 상태에 빠졌고, 한 청년이 무릎 이상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병원 자료를 살펴보던 수잔은 이런 사례가 수십 명에 이르는 것을 발견한다. 는 병원측의 거대한 음모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마지막에는 수잔 자신도 코마의 대상이 되어 수술대..

읽고본느낌 202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