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세 여자

샌. 2024. 8. 3. 14:07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소설이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세 여자(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남성 중심의 운동사에만 익숙한 우리 눈에 이런 여성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슷한 또래의 세 여자는 20대 초반에 만나 운명적으로 얽힌다. 셋 중에서도 제일 주도적인 인물은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중국 상하이 유학중에 박헌영, 주세죽, 임원근, 김단야 등과 만나 사회주의연구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한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일본, 중국, 미국,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인텔리였다. 또한 임원근을 비롯해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여성이었다. 

 

허정숙은 국내에서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여성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일제 탄압이 거세지자 1936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소속의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뒤에는 북한 김일성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고 연안파 숙청의 위기도 넘기고 건재했다. 허정숙은 1991년에 사망했는데 1902년생이니 아흔 살이 되도록 예외적으로 영화를 누린 셈이다.

 

주세죽은 음악 공부를 하러 상해에 유학을 갔다가 허정숙을 만나면서 인생이 격랑 속으로 들어간다. 조선공산당을 만든 박헌영과 만나고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 국내에 들어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고, 여성 계몽 및 항일 운동에 참여하다가 1928년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 남편이 체포되자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피신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김단야와 재혼한다. 나중에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고,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협동농장으로 유형에 처해진다. 첫 남편이었던 박헌영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다. 주세죽은 1953년에 이국 땅에서 쓸쓸히 죽었다. 주세죽과 박헌영 사이에 딸 비비안나가 있다.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허정숙, 주세죽과 합류한 고명자는 이력이 둘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강경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고명자는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조국 해방 운동에 자신을 바쳤다. 그녀는 여운형을 도우며 정치 활동을 계속했으나 6.25 때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 여자는 조선공산당의 트로이카로 불린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의 부인이면서 애인이었고 동지였다. 남자들에 비해 그녀들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희 작가가 <세 여자>에서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셋은 일신의 영광보다 더 높고 큰 이념에 자신을 바친 선구자적인 여성들이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존경심이 일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작가의 말대로 '혁명이 직업이고 역사가 직장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 태어났을 때 조선은 날강도들이 들어와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과 같았다. 그녀들은 재산이나 지위도 버리고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강도를 내쫓으려 투쟁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은 그들에게는 구원의 빛이었다. 그녀들은 당당하게 운명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갔다. 여자의 몸으로 역사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여자>에는 그만큼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또한 해방 이후의 상황에서 분단으로 나아간 책임이 강대국보다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작가는 지적한다. 책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파벌간의 싸움과 이념 대립이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도 노선 투쟁을 하느라 단합하지 못하고 스스로 세를 약화시킨다. 해방 후에 찬탁과 반탁으로 나눠 싸우느라 정국 흐름의 핵심을 놓쳐버린 것이다. <세 여자>는 소설이기 이전에 20세기 우리의 근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역사책이다. 이 책의 부제가 '20세기의 봄'이다. 암담한 시절에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라는 세 여자의 존재가 봄과 같은 따스한 희망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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