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의학이라는 영역 너머의 것이 있다. 치료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절한 제도가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10년간 허무하게 떠나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지은이인 내과 전문의 김현지 의사는 의료 현장에 있으면서 의료 시스템 뒤에 숨겨진 정책의 부조리, 제도의 부재, 가난과 건강의 불평등에 주목했다. 그가 '정책하는' 의사로 나선 배경이다.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올바른 의료 제도를 만드는 일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입법 활동을 돕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만인에게 성취 가능한 최선의 건강'이라고 한다.
<포기할 수 없는 아픔에 대하여>는 지은이가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의 죽음과 삶을 통해 인지하게 된 우리 사회가 갖추었으면 하고 바라는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이야기다. 현장 의사의 생생한 고뇌가 담긴 책으로 현 의료의 문제점과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책이 다르는 소재는 복지와 돌봄, 연명치료, 안락사, 건강 불평등, 의료보험과 의료수가, 요양병원과 간병인, 수도권 대형 병원 쏠림, 전공의와 주치의 제도 등 다양하다. 지금 의대 정원 문제로 의료계가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넓은 틀에서 의료 정책을 재정립하기 위해 중지를 모으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특히 중앙과 지방의 의료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왔으면 한다.
지은이의 주장 중에서 건강 불평등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 와닿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아프고 덜 진료를 받는 게 현실이다. WHO에서는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권력과 돈, 자원의 재분배가 필요하다고 권고하면서 "사회 부정의는 살인이다[Social injustice is killing on a grand scale]"라고 했다. 의료 시스템과 사회 정의의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떤 정책을 세우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었으면 한다. 나는 병을 치료하는 데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병의 내력을 알고 있는 의사가 있다면 환자에 대해 훨씬 나은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주치의 제도는 국가가 지역사회에서 개인 또는 가족 전체가 1차 의료 의사(주치의)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환자는 원하는 의사 한 명을 지정해 등록해야 한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주치의를 찾아가 진료받고 상급 병원으로 가는 여부를 판단한다. 이 제도는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진료권(診療圈) 제도도 검토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것들은 지방의 균형 발전과도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이 책을 통해 의료 정책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려는 지은이의 노력에 감사한다. 병원 밖으로 나와 정책과 제도를 바로잡는 일은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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