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성난 물소 놓아주기

샌. 2024. 7. 16. 11:08

당신이 절에 살든, 도시에 살든, 혹은 가로수가 늘어 있는 조용한 거리에 살든, 다른 어디에 살든 때로 문제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삶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 "의사 선생님,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제게 정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병이 났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을 할 때든, 명상을 할 때든 가끔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라. 이 세상을 자기 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 다그치거나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가족과 세상과 싸울수록 부수적인 여러 가지 문제만 자꾸 불러일으켜 당신은 더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된다.

 

대지처럼 살아가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미동도 하지 말라. 그들이 당신을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다른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당신이 '내 일이 아냐'라는 마음자세를 꿋꿋하게 지닐 때 그런 말은 결코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다.

 

고통을 잘 살펴볼 때는 그 모든 순간이 자신의 성숙과 훈련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명상의 시간이 되어준다. 마음훈련은 사물과 현상을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갖은 어려움과 실망스러운 일들을 당신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는 진리의 사자(使者)들로 여겨라.

 

지혜는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미치는 효과로 판단해야 한다. 그 지혜가 당사자가 일상 삶에서 안고 있는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가라앉혀주는(느긋하고 편안하고 여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을 낳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지혜일 수 없다.

 

아잔 브라흐마가 쓴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발췌한 몇 문장이다. 아잔 브라흐마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물리를 전공했으나 불교도가 되어 태국에서 수행승이 되었다. 서양의 지성인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다가 승려까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아잔 브라흐마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이 책은 불교 명상에 관한 책이다. 돈오(頓悟)는 점수(漸修)를 통해 완성해 나간다고 봤을 때 명상은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는 행위다. '신(神)과의 합일'을 바라는 묵상의 대가들이 기독교 역사에도 무수히 존재했다.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단어는 버림, 사라짐, 하지 않음, 무착(無着), 관조, 순응, 체념, 알아차림, 이해하기, 주시하기, 놓아버리기, 깨달음, 평화 등이다. 모두 불교 사상과 닿아 있는 말들이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단어가 염오(厭惡)다. 세상과 싸우기를 그치고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염오라고 한다. 세계고(世界苦)와 인생고(人生苦)를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할까, 애착(愛着)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한다.

 

불교를 실천종교라고 한다. 이론이나 신념 체계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성난 물소 놓아주기>는 우리의 현실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명상 지침서다. 세상과 떨어져서 마음이 고요하게 되면 삶에 만족하게 된다. 불교의 수행이란 어쩌면 마음훈련법인지 모른다. 부처는 그 길을 인도하는 큰 스승이다.

 

이 책에 불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내주는 예가 나온다. 아쇼카 왕의 동생 이야기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동생에게 아쇼카 왕은 교훈을 주기 위해 계책을 꾸민다.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왕관과 옷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것이다. 각본대로 옆에서 부추기자 동생은 왕관을 쓰고 왕의 옷을 입으며 기분을 냈다. 이때 왕이 나오면서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이건 사형에 해당하는 죄다. 다만 내 동생이니 처형하기 전에 이레 동안만 왕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주마."

이레가 지나고 동생은 사형대에 섰다. 왕이 물었다.

"일주일 동안 왕 노릇을 실컷 즐겼느냐?"

동생이 대답했다.

"며칠 후에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는 판에 어떻게 즐길 수 있겠어요. 저는 즐기기는 고사하고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동생을 풀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후가 되었든, 일곱 달 후가 되었든, 이십칠 년 후가 되었든 결국은 죽음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판국에 너는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들 수 있느냐?"

 

비단 동생만이겠는가. 우리는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신세가 아닌가.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혹자는 죽음을 외면하고 현세의 쾌락을 즐기는 게 최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 쾌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현자는 묻는다. 불교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 앞에서 서두에 적은 불교의 의미를 담은 단어들이 진지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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