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읽은 천운영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바늘'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20여 년 전에 쓰인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특이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여성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인물이어서 충격을 받는다. 소설에 나오는 그들은 못 생긴데다 폭력적인 야수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여성은 예쁘고 우아하다는 기존의 사고 틀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가부장제하에서 구축된 모성이나 여성성의 허구를 작가는 깨부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전부 육식을 탐한다. 이런 동물적인 피의 욕구는 외부세계에 대한그들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행복고물상'에 나오는 여자는 남편을 상습적으로 매질한다. "아내는 야생의 초원을 가졌다. 아내의 몸속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와 성난 발길질을 하는 암말과 살진 들소가 산다." '숨'에서는 소골을 손질해서 먹는 늙은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정글에 있는 늙은 육식동물에 다름 아니다. 함께 사는 손자는 그녀에 의해 사육되는 작은 초식동물이다. 기존의 여자와 남자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된다.
표제작인 '바늘'의 주인공은 남자에게 문신을 해 주는 여자다. 바늘은 전통적으로 여성성의 상징이지만 여기 나오는 바늘은 피를 동반하는 남자와 벌이는 격투기와 같다. 그녀의 어머니가 바늘로 남자를 죽이는 설정은 규범화된 여성성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을 시사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시각에서 천운영의 소설은 읽기가 불편하다. 작가는 '여성성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괴테의 여성성과는 극단의 대척점에 있는 여성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이는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에 가려진 동물적이며 인간적인 본능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왕성한 식욕과 성욕, 폭력성이 어우러진 여성은 그로테스크하다. 비뚤어진 제도에 의해 억압받고 왜곡된 여성의 모습과 감옥을 깨부수려는 욕망을 이렇게 표현했는지 모른다.
천운영의 소설은 기존의 틀에 갇힌 나에게는 생경한 충격을 준다. 작가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천운영 작가만의 신선한 미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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