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이 성질 때문이겠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작품은 부러 멀리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천만 관객의 영화라든지 베스트셀러 책 같은 것은 접하지 않은 게 더 많다. 대신에 알려지지 않고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애써 찾아본다. 그런 작품 중에 알짜배기가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2008년에 나온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대중들이 환호하니까 일부러 읽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번에 신 작가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엄마를 부탁해>가 소환되었다.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2011년 판인데 무려 197쇄를 찍고 있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책을 16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작품성으로 따지자면 <엄마를 부탁해>보다는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더 나아 보인다. 부모를 향한 애틋한 감정과 독자들이 받는 공감은 비슷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후반부에 가면 작위적인 느낌이 난다. 소설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이 들어있다. 소설에서 그것이 단점이 될 수 없겠지만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독자 입장에서는 일말의 아쉬움이 든다.
1938년생 박소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대표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가 겹쳐진다. 그러면서 가족이란 무엇이고, 식구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안타까워 하고 그리워한다. 소설은 우리들 기본 정서를 예리하게 건드리면서 누선을 자극한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일생이 고통과 희생으로만 점철되었을까. 그런 관점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는 게 바른 시선일까. 자식이 - 특히 딸이 - 엄마를 안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나 한 인간에 접근할 수 있을까. 작가는 엄마를 추억하며 이런 질문을 수없이 던졌을 것이다.
"오빠는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엄마를 슬프게만 기억하는 건 우리 죄의식 때문일지 모른다고.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런 점에서 엄마가 비밀리에 만나고 위로를 받은 곰소의 '당신' 이야기는 답답한 체증을 내려가게 하는 소화제처럼 시원하다. 엄마는 죽은 뒤 유령이 되어 찾아가는 곳 중 하나가 '당신'이다. 사실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여인네들을 보면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인과 같은 이미지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뒷집에 살던 동무의 할머니는 얼마나 성격이 괄괄하고 억세든지 젊어서부터 남편을 휘어잡고 살았던 여인이었다. 물론 보편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피에타의 성모상 같은 이미지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일방적이지는 아닐까.
<엄마를 부탁해>을 읽으며 누구의 엄마이건 '엄마'라는 껍질을 벗고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작가는 소설 서두에 한 문장을 적었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