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침이 고인다

샌. 2024. 6. 6. 10:29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침이 고인다'를 비롯해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전반부에 실린 소설은 밀도가 높고 뛰어나지만, 후반부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작가는 주로 도시 변방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것 같다. 잘 보이지 않는, 외면하고픈 아픈 현실을 위트 넘치는 문제로 보여준다. 일상은 고달프고 비루하지만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밟혀도 꿋꿋이 견뎌내고 일어서는 길 위의 잡초처럼 살아내는 숫한 청춘들이 있다.

 

'침이 고인다'에서는 학원 강사로 일하는 그녀가 사는 원룸에 더 가난한 후배가 찾아온다. 그날 밤 그녀는 후배의 얘기를 들으며 같이 지내기로 결심한다. 후배가 그녀에게 들려준 얘기는 어떻게 부모에게 버림받았는가에 대한 아픈 추억이었다. 어린 후배에게 껌을 쥐어주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후배는 메인 목을 껌 한 통을 다 씹으며 달랜다. '침이 고인다는 것'은 상실과 소외의 상징인 것 같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동거를 하게 했지만 같은 방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정이나 연민이 현실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후배는 떠나가고 그녀는 후배가 준 껌을 씹으며 다시 혼자가 된다. 그녀는 고독을 원했지만 멀지 않아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불완전한 소통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고이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해야 할 것이다.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자매의 삶을 다룬 '도도한 생활', 가난한 연인의 성탄 전야의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성탄 특선', 노량진 독서실에서의 경험을 다룬 '자오선을 지나갈 때' 등도 우리 시대의 그늘진 한 단면들이다. 밝고 화려한 뒷면에 숨겨진 이런 인간의 이야기를 작가는 얄궂게 잘 이끌어낸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인간에 대한 다정한 시선이 있기에 가능한 작품이라고 본다.

 

김애란 작가의 문체는 무거운 주제를 간결하면서 경쾌하게 풀어내는 매력이 있다. 가볍게 읽히지만 읽고 나면 묵직한 울림을 준다. 어머니를 따라 옛날에 살았던 산동네 집을 찾아가는 '네모난 장면들'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재미난 비유들이 많이 들어있다.

 

"먼 곳에서, 나이를 많이 먹은 해가 또 한 번의 나이를 잡숫느라 고꾸라지는 동안, 산동네 위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구 어디선가 어둑함이 몸을 불려가는 속도와 함께 땅 식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서른 몇 살의 촌부, 어머니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은 폐활량을 늘리기 위한 허파꽈리처럼 구겨져 있었다. 많은 골목과 계단이 구부러지고 꼬였다가 다시 펴진 뒤 알 수 없는 길들로 이어졌고, 하나의 길로 좁아지는가 하면 폭죽처럼 무수한 길 다발을 쏟아냈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오른 길을 하나도 까먹지 않았는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오르내렸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미로 같은 길을 더듬어 갔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오르내렸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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