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36

봄날은 간다

오늘이 입하(立夏)다. 어느덧 봄날은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에 영화 '봄날은 간다'를 다시 봤다. 일흔줄에 들어서서 보는 영화는 20년 전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조연 정도로 여겼던 치매 걸린 할머니가 이번에는 비중있게 다가왔다. 두 젊은이의 사랑이 인생의 짧은 한 때의 에피소드라면, 할머니에게는 인생 전체가 걸린 '봄날은 간다'였기 때문이다. 매일 기차역으로 나가 죽은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사랑에 아파하는 손주를 위로한다. "버스 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이 영화에 명대사로 회자되는 것이 여럿 있지만("라면 먹고 갈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할머니의 대사도 심금을 울렸다.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당신에게 하고픈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갈 때..

읽고본느낌 11:14:59

괴물 부모의 탄생

교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는 소풍이나 체험 학습을 꺼려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작은 사고만 나도 고소를 당하고, 심지어는 자기 아이에게 독방을 달라고 요구하는 극성 학부모도 있다고 한다. 작년에는 학부모의 항의와 민원으로 고통을 받던 교사가 자살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문제가 되었다. 지나치게 제 자식만 챙기면서 교사를 괴롭히는 학부모를 일본에서는 '괴물 부모'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은 우리보다 먼저 이런 병증을 겪고 있는 일본과 홍콩 사례를 중심으로 괴물 부모가 생겨난 원인과 내재한 심리,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담임이 말하는 괴물 부모의 악행을 보면 기가 차는 사례가 많다. 소풍을 갔다왔는데 제 딸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다시 소풍을 가라고 요구한다든지, 담임의 액세서리나 아이폰을 본 아..

읽고본느낌 2024.04.19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시읽는기쁨 2024.03.11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

시읽는기쁨 2024.02.07

사랑일기 / 하덕규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속을 달려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저 지친 어깨 위에 시장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아무도 없는 땅에 홀로 서 있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 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 사랑일기 / 하덕규 2016년에 밥 딜런이 노..

시읽는기쁨 2024.01.08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23.12.12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 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과 믿음을 노래한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일에 세상을 뜨셨다. 향년 96세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를 쓰셨고, 3년 전에는 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올봄에는 시화전까지 열 정도로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동을 했는데 돌연 부음이 들려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인은 종교적 경건함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을 향한 사랑을 찬미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

시읽는기쁨 2023.10.18

가만히 다정하게

장마철과 연관이 있을까. 짜증 나고 화가 솟는 일이 잦다. 이럴 때는 한 호흡 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정하게. 짜증 나는 원인이 밖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상은 어쩌다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핑곗거리였을 뿐. 누구나 위로 받고 사랑 받길 원한다. 고개를 돌려 둘러보라. 누가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줄 것인가. 이 시들어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자. 작고 연악한 어린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지 모른다. 다정한 미소로 다가가서 껴안아주자. 쓰담쓰담 토닥토닥. 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면 타인 역시 연민의 념으로 바라보게..

참살이의꿈 2023.07.25

사랑방 /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시읽는기쁨 2023.06.24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영화를 먼저 보고 감동을 받아 소설을 찾아 읽었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델리아 오언스(Delia Owens)가 일흔 살에 쓴 첫 소설로 30주 넘게 아마존 1위를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이다. 작가 자신의 야생 동물을 벗 삼아 평생을 보낸 경험이 녹아 있는 소설로, 습지 소녀 카야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사랑과 갈등을 잘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무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해안가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습지 지역이다. 카야는 가정폭력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습지에서 고립되어 혼자 살아간다. 고작 일곱 살인 소녀가 살기에는 거친 환경이지만 카야는 자연의 품 안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은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가정폭력..

읽고본느낌 2023.02.20

늦게 오는 사람 / 이잠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 늦게 오는 사람 / 이잠 "가서 30촉짜리 다마 하나..

시읽는기쁨 2023.02.17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 That Love is all there is / Emily Dickinson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에서 첫 번째 수록된 시다. 평생을 은둔하며 고독 속에서 살아간 에밀리에게 단 한 번 이성을 사랑한 때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쯤 되었을 때 기혼남인 목사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영화 '조용한 열정'에는 목사 부부와..

시읽는기쁨 2023.02.12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오누이 / ..

시읽는기쁨 2023.01.16

섀도우랜드

C. S. 루이스(1898~1963)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여서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았다. 루이스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론자로 옥스퍼드대학 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독신으로 지내다가 50대가 지나서 미국 시인 조이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 영화 '섀도우랜드(Shadowlands))는 둘의 만남과 사랑, 결혼과 조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전에 루이스의 를 읽었지만 솔직히 책의 명성만큼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서양인들의 논리적 사고가 우리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책이었다. 아무튼 루이스는 변증법적 방법으로 결론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루이스의 논리에 매료되어 그의 전 작품을 읽고 심취한 후배가 있는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책으로 만나는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루이스..

읽고본느낌 2023.01.15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내 사랑 그대를 사랑하기 위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대 사랑 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닙니다 우린 그저 하늘 아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풀씨 부딪듯 나 그대 눈빛 그렇게 만났습니다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천지가 강아지풀 어질게 키우지 않듯 내 마음속 그대 사랑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생물학적으로 볼 때 그저 짝을 찾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사랑만큼 강렬한 감정도 없다. 특정 시기가 되면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이성이 마비되고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진다. 운명이라고 부르는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사는 슬프고 허무하다. 운명은 왜 그리 쉽게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는지, 어느..

시읽는기쁨 2022.12.23

젊은 날의 초상

내 젊은 날의 노트를 열어본다. 노트 안에는 진리를 향한 갈구에 목말라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중에서 49년 전인 1973년 11월 30일의 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는 C'라고 부르면서 적은 글이다. 그 시절에 나는 인간과 세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질문에 답해주는 것이 진리였다. 진리는 반드시 존재하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믿었다. 진리야말로 무명의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었다. 내가 볼 때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 정신의 금자탑이 철학이었다. 철학 사상을 파고들면 나름대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몰두했다. 전공 공부는 아예 도외시했다. 얼..

참살이의꿈 2022.12.01

인섬니악 시티

책 내용이나 지은이인 빌 헤이스(Bill Hayes)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그러다가 엉뚱한 데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눈치를 못 채고 그나마 책의 뒷부분에 가서였다. '십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아기처럼 자는 남자하고 살았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러니 지은이를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 남자를 남편이 아닌 '파트너'라고 지칭하는 게 약간 이상하긴 했으나 서양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책의 부제가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다. 파트너였던 스티브가 죽고 뉴욕으로 주거를 옮긴 지은이는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는 - '불면의 도시'라는 뜻으로 뉴욕을 가리킨다 - 흥미로운 뉴욕 생활과 올리버 색스와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읽고본느낌 2022.10.27

러빙 어덜츠

넷플릭스에 혹시나 볼 만한 게 있는지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영화다. 많은 경우 실망을 하지만 이 영화는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 제목이 '러빙 어덜츠(Loving Adults)'인데 번역하면 '사랑스런/사랑하는 어른들' 쯤 될까, 그러나 내용은 제목과 반대로 끔찍한 살인을 소재로 한 치정물이다. 영화는 미제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랑과 결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진행과 두 부녀의 대화가 교차하며 스토리는 전개된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쓴 애착과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영화는 잘 보여준다. 두세 차례 반전도 나온다. 청순해 보이는 아내 레오노라가 뒤로 갈수록 섬뜩한 여자로 변한다. 불륜을 저지른 어리바..

읽고본느낌 2022.09.16

나의 해방일지

지인이 추천해줘서 다시보기로 닷새 동안 몰아서 본 드라마다. 16회분으로 올봄에 jtbc에서 방송되었다.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의 키워드는 '추앙'과 '환대'인데 이 단어들 자체가 낯설고 생경해서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정과 구씨 관계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뭐, 애매한 것은 애매한 채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환대'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화의 세계라면 가능하겠지만. 지지난주에 어느 모임에서 MZ세대의 의식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요사이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을 알고 싶으면 '나의 해방일지'를 보라고 한 분이 말해줬다. 경기도 산본에 살면서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애환과 꿈, 사랑이..

읽고본느낌 2022.07.09

가장의 밤 / 김용화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 가장의 밤 / 김용화 가장으로서의 남자에게는 두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내 울타리를 소중히 지키려는 마음과, 경계에 갇힌 답답함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의 세 연과 끝 연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 나에게는 읽혔다. 나는 늘 뒤쪽이 승했다. 반면에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넘쳐나는 것 같다. 엊저녁에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아나운서가 소개해 주어서 이 시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 이불 덮어주는 일도, 딸 지갑에 지폐 찔러주는 일도, 아들놈 우산 갖다주는..

시읽는기쁨 2022.02.26

온유에 대하여 / 마종기

온유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 사람 빈집 안의 작은 불꽃이 오늘은 더욱 맑고 섬세하구나 겨울 아침에 무거운 사람들 모여서 온유의 강을 조용히 건너가느니 주위의 추운 나무들 눈보라 털어내고 눈부신 강의 숨결을 받아 마신다.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친구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나도 저런 색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불타는 뜬구름도 하나 외롭지 않구나. - 온유溫柔에 대하여 / 마종기 '따뜻할 온(溫)'과 '부드러울 유(柔)', 온유(溫柔)는 참 아름다운 말이다. 사전에는 '성격이나 태도 따위가 온화..

시읽는기쁨 2022.02.15

그 겨울의 선물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 빽빽할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다행히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내 맞은편에는 한 아가씨가 책에다 시선을 묻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보기를 애써 피하며 창 밖만 내다봤다. 대학 1학년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1년은 어영부영 지나갔다.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서 낙제한 과목은 방학 때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2학기를 마쳤을 때 세 개 과목인가가 성적 미달이 되어 윈터 스쿨을 듣고 늦게서야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원주역을 지나면서 한산해졌다. 셋씩 비좁게 앉았던 자리도 두 사람으로 줄어들며 여유로워졌다. 그제서야 앞에 앉은 아가씨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계란 같..

길위의단상 2021.12.19

사진첩 / 쉼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프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

시읽는기쁨 2021.12.01

어떤 도둑질 / 윤정옥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 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 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 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

시읽는기쁨 2021.07.17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만난 여학생(박경련, 蘭)에게 백석은 한눈에 반한다...

시읽는기쁨 2021.06.02

정약용의 여인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여인의 시중을 받았고 딸까지 낳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여인의 이름은 진솔이고 딸은 홍임이다. 다산이 18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마재로 돌아올 때 진솔과 홍임도 동행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다산에게 소실이 있었다고 해서 그분의 학문이나 인격에 흠이 되지는 않을 텐데, 후학들이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쉬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에 흥미를 느끼던 차에 찾아본 책이 최문희 작가의 소설 이다. 소설에는 다산의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부인인 혜완(惠婉), 그리고 유배지에서 만난 진솔과 홍임의 이야기가 얽혀서 나온다. 혜완은 명문가의 따님으로 다산보다 한 살 위였다. 혜완은 선비집 안방마님으로서의 위엄..

읽고본느낌 2021.05.09

구들목 /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책임이 있었고 때론 배려..

시읽는기쁨 2021.02.28

먼 바다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교수인 미호는 SNS를 통해 연락이 닿은 요셉을 미국 여행길에 뉴욕에서 만난다. 40년 전 그들은 여고생과 신학생으로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진다. 그건 오해였을 거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미호가 첫사랑을 만나려는 것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아픔도 있겠지만 추억하는 첫사랑은 아련하면서 달콤하다. 그러나 첫사랑과의 재회가 꼭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 무수히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

읽고본느낌 2020.12.05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20.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