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40

구들목 /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책임이 있었고 때론 배려..

시읽는기쁨 2021.02.28

먼 바다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교수인 미호는 SNS를 통해 연락이 닿은 요셉을 미국 여행길에 뉴욕에서 만난다. 40년 전 그들은 여고생과 신학생으로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진다. 그건 오해였을 거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미호가 첫사랑을 만나려는 것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아픔도 있겠지만 추억하는 첫사랑은 아련하면서 달콤하다. 그러나 첫사랑과의 재회가 꼭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 무수히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

읽고본느낌 2020.12.05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20.10.07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

시읽는기쁨 2020.08.31

노팅 힐

가끔 단것을 먹고 싶을 때가 있듯, 달콤한 이야기가 당기는 날이 있다. 그래서 찾아본 영화가 '노팅 힐(Notting Hill)'이다. '노팅 힐'은 영국 런던에 있는 동네 지명이다. 유명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와 노팅 힐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가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극히 드물어야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조건이 된다. 보통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남자의 욕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안나 스콧 역)와 휴 그랜트(윌리엄 대커 역)가 두 주인공으로 나온다. 스타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줄리아 로버츠가 매력적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명대사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The fa..

읽고본느낌 2020.04.30

정릉의 추억

고3이 되면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살던 단칸방이 비좁은 데다 골목에 붙어 있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공부에 집중할 시기에 조용한 환경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구한 방은 정릉에 있었다. 도봉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로 가까이에 '청수장'이 있었고, 서울이지만 시골 분위기가 나는 마을이었다. 전에 살던 데에 비하면 이사한 집은 대궐이었다. 터가 엄청 넓었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집 뒤가 바로 도봉산 자락이었다. 외할머니와 내가 살 방은 별채로 되어 있어 주인집과 떨어져 있었다. 세를 주기 위해 최근에 지었다고 했다. 방이 넓었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조용했다. 비록 셋방이었지만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다만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 버스를 30분 이상 타고 가야 했다. 다행히 ..

길위의단상 2020.03.21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시를 쓰던 어느 날 거짓말 한 번 있었습니다. 밥을 먹어야 하겠기에 돈을 벌러 나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어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놓고 나왔으니 이천 원만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 돈 빌려 집에 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날따라 비조차 내렸습니다. 우산 없이 집으로 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 내 안에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하지만 마음이 비어 시를 쓸 수 없게 된다면 더욱 슬픈 일이 될 거야 - 이 말 한마디 하고 내게 웃었습니다. -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조기영, 고민정 커플은 가난한 시인과 여자 아나운서의 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다. 시인은 가난했고, 희귀병을 앓고 있었으며, 열한 살이나 연상이..

시읽는기쁨 2020.03.17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달 초에 홍상수 감독이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이 화려한 불꽃놀이를 펼쳐보인 뒤라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한국 감독이 연이어 유수의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사실은 기쁜 일이다. 그래서 홍 감독의 2015년 작품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올레TV에서 찾아 감상했다.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단박에 느껴졌다. 영화를 만들 때는 이미 김민희 배우와 사랑에 빠졌던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도 영화감독이다. 두 사람은 대중의 비난이 거세 공개적인 행보를 못 하고 있다. 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뒤처리가 매끄러웠다면 소송까지 가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안 보였어도 되지 않았..

읽고본느낌 2020.03.13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

시읽는기쁨 2020.03.11

내 사랑 백석

1938년, 청진동 시절이었다. 백석과 자야는 아침부터 독서에 골몰하느라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이때 자야의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약초(若草)극장에 영화 '클레오파트라'가 왔는데, 함께 가자고 졸랐다. 자야는 가고 싶었으나 백석이 안 갈 것 같아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백선생! '클레오파트라' 보러 같이 가자구요!" 라고 보챘다. 백석은 대답 없이 잠자코 있더니, 곧바로 자야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에 나오는 일화다. 자야가 백석과의 사랑을 회상하며 쓴 이 책을 읽어보니 둘은 상상한 것보다 더 간절하고 열렬하게 사랑한 것 같다. 요사이 말로 하면 닭살 돋는 연인이었다.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건 1936년 함흥에서였다. 백석은 함흥에 있는..

읽고본느낌 2020.02.07

피아니스트

이자벨 위페르를 만나고 싶어 찾아본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으로 2002년에 개봉된 뒤, 2016년에 재개봉된 영화다. 인간 내면의 욕망과 병적인 심리를 잘 그려낸 영화다. 짜임새도 좋고, 위페르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은 아니다. 사랑을 가장한 집착일 뿐이다.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역)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와 에리카 본인의 변태적인 사랑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머니와 에리카는 가정환경에서 유래한 정신적 상처를 갖고 있다. 건전한 사랑의 방식을 배우지 못한 두 사람은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표출한다. 그것이 결국 주변 사람까지 황폐시킨다. 이 영화는 19금이다. 일부 성적인 표현은 수위가 높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영화는 ..

읽고본느낌 2019.11.03

광양 여자 / 이대흠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터로 있는 게 즐거워서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찬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

시읽는기쁨 2019.01.19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물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소년 시절 겨울 풍경을 소환해 본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봐도 온종일 논 것밖에 없다. 학원도 없었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도 없었다. 낮에는 앞 논에 나가 '씨게또'를 타고, 양지바른 마당에서 뜀박질하며 놀았다...

시읽는기쁨 2019.01.02

사랑 / 김중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핧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 사랑 / 김중 곁불만 쬐며 살아왔다. 가까이 가면 너무 뜨거워 고개 돌렸다. 한 여인만이겠는가. 삶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실로 삶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자서전을 쓰려 해도 소재가 없는 인생..

시읽는기쁨 2018.12.25

옛날 사람 /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 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

시읽는기쁨 2018.12.15

500일의 썸머

토요일 밤에 EBS에서 우연히 본 영화다. 윗집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서, 어쩔 수 없이 거실에 나가 채널을 돌리니 마침 이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은 웬만한 소음은 잊을 수 있다. '500일의 썸머'는 썸머와 톰의 500일에 걸친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썸머가 활달하고 현실적이라면, 톰은 소심한 반면 순수한 청년이다. 썸머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이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썸머는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반면에 톰은 천생연분으로서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둘은 다른 점이 많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여느 젊은이들처럼 데이트를 즐긴다. 싸울 때도 있지만 곧 화해한다. 그런데 300일쯤 된 때, ..

읽고본느낌 2018.12.11

사랑고파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라고 시작하는 노래다. 가끔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향해 부르는 경우를 본다. 어느 경우든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불편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주는 능력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건 유년기에 한정된 얘기다. 인간의 일생에서 사랑을 받기만 하는 시기는 유년기다. 이때는 온전히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사랑 받는 타령만 한다면 정신적으로는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다. 부모로부터 정신적 독립이 안 된 채로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이 ..

참살이의꿈 2018.10.19

지금 만나러 갑니다

본 지 두 달이 넘은 영화다.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기에는 시간이 꽤 흘렀다. 눈물을 훔치고 자주 미소를 지었는데, 감상을 바로 기록하지 않으면 놓치는 게 많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이 영화를 봤다. 보면서 참 일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의 원작이 일본 소설이다. 일본에서도 영화로 만들었다 한다. 같은 원작의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죽은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는 상황 설정이 거북했는데 이내 둘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든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운명적이고 간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둘의 관계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결심으로 완성된다. 자신의 이른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녀는 동화 같은 사랑을 택한다. 여자 주인공인 손예진은 무척 아름답고 배역에 잘 어울린..

읽고본느낌 2018.06.04

5월의 노래 / 괴테

아, 대자연이 찬연하게 내게 빛을 보내요! 아, 햇살이 밝게 비쳐요 온 들판이 미소 지어요! 가지가지 이파리마다 꽃망울 터지고 수풀 사이 수천 가지 노랫소리가 들려요 가슴 가슴마다 환희와 축복이 넘쳐요 오, 대지여, 태양이여, 기쁨이여, 환희여 오, 사랑이여, 사랑하는 이여! 저 높은 언덕 위 드높은 아침 구름처럼 모두가 황금빛으로 아름다워요! 찬연한 그대 모습도 온 들판을 환하게 축복해주는 이 넓은 세상을 온통 안개꽃으로 감싸요 소녀여, 소녀여, 그대를 사랑해요! 참으로 빛나는 그대의 눈빛! 나를 사랑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대! 사랑 때문에 종달새들도 높이 대기 속에서 노래하고 아침 꽃들도 모두 하늘 냄새를 사랑해요 뜨거운 가슴, 뜨거운 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듯 그대는 내게 기쁨과 젊음과 용기를 줘요..

시읽는기쁨 2018.05.13

둔황의 사랑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다 읽지 못했는지 모른다. 내용이 어렵게 느껴져서 그랬을 것 같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보고 옛날이 어슴푸레 떠올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역시 명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이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탐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알 것 같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주간 잡지의 기자로 일하며 가난하게 살아간다. 단칸방에서 동거하는 여자가 있지만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 현실은 누추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꿈꾸는 세상은 따로 있다. 서역의 사자를 찾고, 공후를 불었다는 노인을 만나려 한다. '천세불변(千世不變)'이라고 비단 조각에 적힌 '누란의 소녀' 미이라도 주인공의 관심을 끈다. 우리는 찰나의 존재들이다. 사랑이 영원으로 이어지길..

읽고본느낌 2018.04.13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제목만 보면 괴기물로 오해하기 쉬우나, 청소년의 청순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췌장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소녀와 동급생 남자 친구가 주인공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병에 걸린 같은 부위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네 안에서 살고 싶다'는 표현이면서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남자 주인공(이름이 하루키였다. 이 영화에서는 이름이 잘 불리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은 그저 '친한 친구'라고 부른다.)의 캐릭터가 특이하다. 하루키는 교실에서 급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일종의 왕따 학생이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인 사쿠라는 동급생의 퀸카다. 자신의 병을 감추고 명랑하게 지낸다. 1년 뒤에 죽는다는 말을 듣고도 저럴 수 있을까, 싶다..

읽고본느낌 2018.03.30

따뜻한 편지 / 이영춘

비는 오는데 우체국 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지쳐 아들아 이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 출금 전표도 대신 써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공직에 있을 때 제대로 했는지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 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 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로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8.03.30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 응 / 문정희 "응"이라는 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육감적인 생명의 언어다. 형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시선이 놀랍다. 그러고 보니 "응"을 쓸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카톡으로 대화할 때는 보통 "ㅇㅇ"이라 쓴다. 시인이 말하는 "응"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땅 위에서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화, "응".

시읽는기쁨 2018.01.19

바닷마을 다이어리

따뜻하게 가슴이 데워지며 봤던 영화다. 연말이 되어선지 이 영화가 생각난다. SF 장르를 선호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인간애가 담긴 이런 잔잔한 영화도 좋아진다. 네 여배우의 얼굴만 봐도 미소가 절로 생긴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곱게 자랄 수 있는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는 이야기다.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네 자매를 함께 묶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을 그렸지만 가족애를 뛰어넘는다. 내가 행복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잘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눈에 익다. 가족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잘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남자 캐릭터는 좀 엉뚱하게 나온다. 보살핌이나 배려를 강..

읽고본느낌 2017.12.30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 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

시읽는기쁨 2017.10.21

여보라는 말 / 윤석정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당신은 나지막하게 사랑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가 되어도 내가 아니 되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먹먹해져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니 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이 세상 기꺼이 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깜깜한 나에게 전부를 보여준 당신 당신은 겨울 꽃처럼 단아한 신부가 되었고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에 살지라도 당신이 내민 손을 꼬옥 붙잡고 가겠다..

시읽는기쁨 2016.08.21

보살 / 김사인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 날을 나도 힘도 안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하요. 그저 좋아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찌르르 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 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 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 길로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면 혀라우. - 보살 / 김사인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오염된 세상에서 이런 건 뭐라 불러야 할까. 인간이 아가페의 흉내를 낸다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6.08.16

애쓴 사랑

이런 삶을 만나면 부끄럽다. 나는 한 번도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황시백 선생은 세상과 불화하면서 먼 꿈을 꾼 사람이다.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올곧게 나아갔다. 선생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교육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불살랐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는 몸이 상해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선생도 그랬다. 선생은 교사였고, 농사꾼이었고, 목수였다. 몸을 낮춰 세상을 사랑했다. 이 책에는 교육보다 농사짓는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선생은 도시를 떠나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는 사잇골 농촌 공동체를 꿈꿨다. 집안이 가난했던 선생은 젊었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다. 피를 팔아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지낼 때도 아픈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었나 보다. 교직을 떠나서 농사를 택한 것..

읽고본느낌 2016.05.19

나의 생명 수업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서남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성호 선생이 20여 년간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줄기에서 만난 자연의 벗들과 만나고 대화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뒷산이라고 표현한 학교 가까이 있는 산이 제일 많이 등장한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생명체가 주인공들이다. 선생의 관심은 다양하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 등 범위가 넓다. 버섯이나 오색딱따구리처럼 수개월 넘게 매달리기도 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생명을 대하는 지은이의 따스한 마음이 감동을 준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큼 사랑하느냐다. 집 앞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거기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닭의장풀에 대해 ..

읽고본느낌 201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