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정릉의 추억

샌. 2020. 3. 21. 11:25

고3이 되면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살던 단칸방이 비좁은 데다 골목에 붙어 있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공부에 집중할 시기에 조용한 환경이 필요했다아버지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구한 방은 정릉에 있었다. 도봉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로 가까이에 '청수장'이 있었고, 서울이지만 시골 분위기가 나는 마을이었다.

 

전에 살던 데에 비하면 이사한대궐이었다. 터가 엄청 넓었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집 뒤가 바로 도봉산 자락이었다. 외할머니와 내가 살 방은 별채로 되어 있어 주인집과 떨어져 있었다. 세를 주기 위해 최근에 지었다고 했다. 방이 넓었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조용했다. 비록 셋방이었지만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다만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 버스를 30분 이상 타고 가야 했다. 다행히 종점이어서 등교할 때 서서 가는 일은 없었다.

 

주인은 젊은 부부였는데 우리가 갔을 때 아주머니는아기를 임신 중이었다. 두 분은 인상이 선했고, 특히 아주머니가 친절했다. 그러나 여자치고는 과묵한 편이었다. 아저씨는 일요일이면 마당에서 개와 장난을 치며 놀았다. 아저씨가 야구 방망이로 고무공을 치면 개가 물어오는 훈련을 주로 시켰다. 나는 방에서 구경하다가 때로는 뒷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곤 했다.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팔베개하고 누워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제일 행복했던 휴일 오후 시간이었다.

 

주인집에는 식모 아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어지간한 집은 식모를 두고 살았다. 그만큼 사람값이 쌌다. 그 아이는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실제는 동갑이었다. 전라도 나주가 고향인데 먼 친척 집에 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모두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아이는 아담한 체구에 붙임성이 좋았는데, 성격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름은 미자였다. 그러나 내가 직접 이름을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는 공부에 쫓기고 있었다. 미자는 어쩌다 저녁 시간에 마주칠 때가 있었다. 서로 피하며 지나갔을 뿐 말 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한집안에 사는 같은 또래의 이성이니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가끔 그 집 거실 앞을 지날 때 집안일을 하거나 소파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미자 모습이 보였다. 그때 약간은 애틋한 연민의 감정이라도 일었을까. 간혹 눈길이 마주쳤더라도 무심한 듯 얼굴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주인집 부부가 창경원 벚꽃 구경을 하러 갈 때 외할머니와 나도 따라나섰다. 아마 같이 가자는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자도 함께였다. 동물원을 구경하고 나서 나무 아래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어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미자와 나는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른들이 심부름을 시켰는지, 아니면 미자가 어딜 구경하러 가자 했는지 까닭은 모르겠다. 그래서 미자와 처음으로 둘이 있게 되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나이는 같았어도 가까이 있으니 미자는 나보다 훨씬 더 철이 들고 성숙해 보였다.

 

우리는 동물원으로 다시 갔다. 미자는 북극곰이 좌우로 몸을 흔들며 춤추는 걸 재미있어 했다. 나한테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둘이서 벤치에 앉아 과자를 먹은 것 같은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아마 내 학교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미자에 대해 궁금한 걸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다. 뒤에 아쉬운 감정이 남았던 거로 봐서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을 게 틀림 없다.

 

그날을 기점으로 미자와 나는 친근해졌다. 마당을 지날 때 괜히 주인집 거실을 흘깃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과 달리 미자도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었다. 외할머니한테 놀러 온 미자와 외면하지 않고 몇 마디씩 주고받을 수 있었다. 차갑게 보이는 면이 있어도 싹싹한 아이란 걸 새롭게 발견했다. 미자는 식모라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건 나보다 훨씬 더 많았다.

 

초인종을 누르면 미자가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어서 와" 하면서 반갑게 맞아줄 때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이 넓은 집에 미자와 둘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공상도 했다. 미자가 주인집 아주머니한테 야단을 맞고 있다고 외할머니가 알려 준 날이었다. 화장실을 가려는데 미자가 집 뒤 벽에 기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다. 숨소리라도 들릴까 살금살금 뒤돌아서며 내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다. 착한 미자를 울린 아주머니가 미웠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개교 50주년 행사로 체육대회 행사를 크게 열었다. 3학년은 전체가 포크댄스를 했는데 나는 여자 역을 맡게 되어 여장을 해야 했다. 여자 옷은 주인집 아주머니가 처녀 때 입던 옷을 빌려주었다. 스타킹은 미자가 내줬다. 여장을 한 내 모습을 보고 모두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미자는 눈물이 빠지도록 박장대소했다. 자기보다 더 예쁘고 여자 같다고 놀렸다.

 

미자는 스타킹을 빌려준 대가로 포크댄스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미자 손을 처음 잡아봤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지만 미자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너무 불평등했다. "넌 너무 순진해." 훗날 여자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 말을 미자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옆에서 지켜보는 외할머니 눈치가 보여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던 미자의 모습이 선하다.

 

토요일 오후였던가, 미자가 방문을 노크했다. 넓은 집에는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었다.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쭈뼛쭈뼛따라가서 주인집 거실 소파에 앉았다. 미자는 주인집 아저씨가 마시는 거라며 차를 한 잔 타줬다. 달콤하면서 홍차 비슷한 향기가 났다. 미자는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내 귀에는 윙- 하는 소리만 들렸다. 누가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미자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해 가을에 미자는 떠나갔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해산과 산후 일을 도와주고 나서였다. 미자가 지나가는 말로 이 집에서 나갈지 모른다는 말을 했지만 그냥 흘러 들었다. 나는 대학 입시를 코 앞에 두고 쌍코피를 쏟으면서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밤낮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느라 미자를 만날 겨를이 없었다. 아니, 미자를 잊고자 했는지 모른다.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미자는 떠났다. 공장에 취직했다는 소식은 나중에 외할머니에게서 들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바로 그 집에서 나왔다. 미자의 연락처를 억지로 알아보지는 않았다. 미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확신이 없었다. 나는 미자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가벼운 연민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미자의 감정도 그 정도였을 확률이 크다. 미자와 나는 우연히 같은 시공간에서 만났던 인연이었다. 같은 또래였지만 미자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미자는 식모였다. 책가방 들고 학교 가는 내 모습을 매일 보면서 미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는 미자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였다.

 

몇 년이 지난 뒤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S 방직 노조의 농성 집회장에 미자가 있었다. 동료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화면에 스쳐갔다. 긴가민가 했지만 미자가 틀림 없었다. 다음 날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집회는 해산되고 다수가 연행 되었다. 경찰에 끌려가는 여공의 모습이 뉴스 화면을 채웠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정릉의 집에서 울고 있던 미자를 보며 뒷걸음질 치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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