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텅 비었다

샌. 2020. 3. 10. 12:38

하필 이 시국에 이빨이 고장 났다. 진통제로 버티지만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프다.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이상이 나타난 건 서너 달 전이었다. 딱딱한 걸 씹으면 통증이 오는 정도였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전에 다른 이빨도 그런 식으로 몇 달 참았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병원에 가지 않은 채 나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나흘 전에 갑자기 통증이 찾아왔다. 아프면 어느 부위나 고통을 주지만 치통도 만만치 않다. 심해졌다 약해졌다 주기적으로 괴롭힌다. 죽으로 연명하면서 음식물 온도도 잘 맞춰야 한다. 조금만 뜨겁거나 차가워도 안 된다. 인상 쓰면서 밥을 먹어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단골 치과는 상가 건물 3층에 있다.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병원과 약국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스무 점포는 될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인 곳이다. 하지만 모두 피난이나 간 듯 인적이 끊어지고 텅 비었다. 투명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보이는데 전체 병원과 약국 중에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손님을 딱 한 사람 봤다. 코로나19가 무섭다는 걸 실감했다. 설마 아픈 사람이 없지는 않을 텐데 감염이 무서워 어지간해서는 병원을 찾지 않는 것 같다.

 

이빨에 금이 갔다고 한다. 신경 치료를 하고 때워야 하는가 보다. C 치과를 이용한 지는 10년가량 되었다. 의사분이 워낙 친절하고 신뢰를 줘서 나는 무조건 예스다. 같이 따라간 아내도 부실한 이빨을 검진받고 같이 치료를 시작했다. 합해서 200만 원이 들었다. 둘이 터키 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돈인데 이빨 치료로 들어가 버렸다. 안 그래도 올해는 여행 다닐 분위기가 아닌데 잘 되었다 싶기도 하다.

 

치료 뒤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받을 때 마스크도 샀다. 마스크를 사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더니 그날 약국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에 1인 2매로 제한하는 정책이 효과를 본 것 같다. 뉴스를 보니 약국 앞에 늘어선 긴 줄과 함께 마스크가 동나 구하지 못한 사람의 인터뷰가 나온다. 약국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원래 자극적이지 않으면 뉴스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게 보도의 속성이다. 때로는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는 일부 보도는 코로나19에 대한 대중의 공포감을 부추긴다.

 

코로나19 와중에 이빨 치료를 시작했다. 혹 감염이 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탈이 나도 왜 하필 이때란 말인가. 코로나19에 제일 위험한 곳이 치과일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치료를 받아야 하니 무방비 상태가 아닌가. 말이 씨가 된 건지 앞으로 두 주는 치과 출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제일 위험해 보이는 곳은 그만큼 경계가 철저할 것이다. 나는 또는 우리는 아니겠지, 라고 방심할 때 바이러스는 빈틈을 노린다. 그런 점에서 치과는 제일 안전한 곳인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믿으며 다닐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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