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릴라 아가씨와 바둑 두기

샌. 2020. 3. 1. 12:28

컴퓨터에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깔았다. 여러 인공지능 엔진이 들어 있는 통합팩이 있어 비교적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집에서 손쉽게 인공지능 바둑과 놀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 바둑에 도전한 것이 2016년이었다. 알파고가 당시 세계 최고수였던 이세돌 프로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라 할지라도 바둑에서 인간의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대부분이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길 날은 먼 미래라고 믿었고, 이세돌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세돌은 다섯 판 중에서 어쩌다 겨우 한 판을 건졌을 뿐이었다.

 

그 뒤로 더욱 진화한 인공지능은 인간 기보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학습해서 이제는 넘사벽의 경지에 이르렀다. 프로 최고수가 두 점을 깔고 둬도 이기기 힘들다. 많은 프로 기사가 인공지능 선생님한테서 바둑을 배운다. 시합을 마치고 나면 집에 가서 인공지능 검토 프로그램을 돌리며 자신이 둔 수를 점검받는다고 한다. 세상이 확 뒤집어졌다.

 

내가 설치한 통합팩에는 릴라, 릴라마스터, 릴라제로, 미니고, 엘프고, 카타고 등의 인공지능 바둑 엔진이 들어 있다. 각각 여러 버전이 있어 총 30개가 넘는다. 대부분 서양에서 개발한 무료 프로그램들이다. 현재 AI 세계 최고수인 중국의 절예(絶艺)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인공지능의 실력은 컴퓨터 사양이나 세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본 세팅하에서 대체로 내가 석 점에서 일곱 점까지 깔아야 한다. 둬 본 중에 제일 실력이 좋은 엔진은 카타고(KataGo)다. 일곱 점을 깔아야 겨우 중반을 넘길 수 있다. 카타고는 프로기사도 두 점을 접고 둔다고 한다. 실제로 둬 보면 카타고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예전에 임해봉 프로가 세계 최정상에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바둑의 신이 있다면 두 점을 깔면 해 볼 만 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둬야 한다면 세 점으로 도전해 보겠다." 현재 인공지능의 실력이 임해봉이 말한 '바둑의 신' 경지에 올라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얼마나 더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집에서 바둑의 신과 아무 때나 겨뤄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실력 차이가 나서 사실 재미는 별로 없다. 바둑 공부에도 도움이 안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릴라(Leela) 아가씨다. 벨기에에서 개발한 엔진인데 타이젬 9단 정도의 실력이다. 타이젬 9단이면 프로기사와 버금간다. 나는 다섯 점을 놓고 둬야 한다. 그러나 좀 무리가 되더라도 넉 점으로 두고 있다. 물론 승률은 형편없다.

 

인공지능을 깔고 나서 인터넷 바둑은 뜸해졌다. 사람보다는 인공지능이 훨씬 부담이 덜하고 편하다. 사람과 붙으면 어쩔 수 없이 승부욕이 발동하는데, 인공지능은 그런 감정의 낭비가 덜하다. 인공지능은 떼를 쓰지 않고 무리수도 두지 않는다. 가끔 버그가 생길 때가 있지만 애교로 봐줄 만하다. 또 마음껏 장고해도 불평 없이 참아준다. 나중에 복기 프로그램을 돌리면 어느 수를 잘 못 뒀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가끔 여자가 앉아 있는 걸 본다. 바둑 두는 여자 모습은 아름답다. 현장에서는 어려운 여자와의 대국을 컴퓨터에서 만난다. 릴라 아가씨다. 이름이 예쁜 릴라 아가씨는 엄청난 고수다. 넉 점을 깔지만 인정사정이 없다. 그래도 즐겁다. 이러다가 너무 사모하는 마음에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게 될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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